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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시의회 회의록

Gyeongsan City Coun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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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회 경산시의회(임시회)폐회중

청원심사특별위원회회의록

제2호

경산시의회사무국


일  시  2002년 11월 15일(금)

장  소  청원심사특별위원회 회의실


  1. 의사일정
  2. 1. 한국전쟁 전후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위령사업 등 보상에 관한 시의회 조사활동 청원의 건

  1. 심사된안건
  2. 1. 한국전쟁 전후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위령사업 등 보상에 관한 시의회 조사활동 청원의 건(이태준 외 7인 청원)

(11시12분 개의)

○위원장 정교철   의석을 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지금부터 제68회 경산시의회 임시회 폐회중 청원심사특별위원회 제2차 회의를 개의하겠습니다.
  동료위원 여러분!
  그 동안 지역사회 발전과 주민 복리증진 및 의원연수 등 의정활동에 노력해 오시다가 오늘 제68회 임시회 폐회중 청원심사특별위원회 제2차 회의를 맞이하여 위원 여러분들을 건강한 모습으로 뵙게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그 동안 본 특위에서는 유족대표와 간담회 실시,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현지확인, 특히 본 위원회에 회부된 청원과 유사한 지역인 경남 산청군의회와 전남 화순군의회 방문 및 현지확인을 한 바 있으며, 국회사무처, 행정자치부, 국방부, 경상북도지방경찰청, 대구교도소, 경산경찰서, 국민일보사, 매일신문사 등 관련 기관단체 자료요구 공문발송과 2002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피학살자 신고접수처를 설치하여 운영하던 중 행여나 누락자가 있을까봐 기간을 11월 19일까지 10일간 연장하여 접수를 받고 있는 등 활발하게 청원심사 특위활동을 실시하여 왔습니다.
  여러 가지로 바쁘신 가운데도 불구하시고 본 특위활동에 수고해 주신 위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위원 여러분들과 증언자 여러분들을 소집하게 된 것은 본 특위에 회부된 한국전쟁 전후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등 보상에 관한 시의회 조사활동 청원에 대하여 그 당시 민간인 희생사건 현장 또는 주변에서 직·간접적으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과 유족들의 증언을 청취하여 청원에 대한 진상조사활동과 향후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남기고자 이렇게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위원 여러분들과 오늘 증언을 위하여 참석해 주신 증언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드리면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 한국전쟁 전후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위령사업 등 보상에 관한 시의회 조사활동 청원의 건(이태준 외 7인 청원) 

○위원장 정교철   의사일정 제1항, 한국전쟁 전후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등 보상에 관한 시의회 조사활동 청원의 건을 상정합니다.
  오늘 본 특위에서 증언되는 내용은 특위활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증언되는 내용은 기록되어 본 특위 청원심사활동과 향후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에 이념적 갈등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하에서 발생되었으나 5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정말 가슴이 아픈 민족상잔의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이념적 갈등을 떠나 인도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이 사건에 대한 청원이 접수되고 청원심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된 것만으로도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증언하시는 분들은 기탄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당시 사건에 대하여 과장되거나 거짓없이 알고 계시는대로 소상하게 말씀하여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말씀하실 때는 증언자의 주소, 성명을 먼저 말씀해 주시고 사건당시 시기와 장소, 피해 상황, 가해자 학살형태 등을 육하원칙에 의거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의진행은 먼저 증언자의 증언을 청취한 뒤에 본 특위위원님들께서 보충질의하실 사항이 있으면 질의 답변하는 방법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어느 분이 먼저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예, 정영훈 씨께서 먼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인 정영훈   평산동에 정영훈입니다.
  저는 고산에서 고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산동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우리가 ’63년도에 평산으로 이사를 오고 저는 정평동 외가에서 다니면서 내가 오기는 ’65년도에 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담배농사를 지었습니다.
  흙벽돌을 가지고 집을 짓고 했는데 현재 국제광학 위치가 그때 흙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흙이 붉은 황토흙이라 힘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우리가 그때 올 때는 흔히 사람 해골을 당시에는 한 두 개 구경하면서 그렇게 지냈는데 그리고 난 뒤에 나이가 15세쯤 되고 나무도 하고 하면서 그 당시에는 해골이 있으면 여사로 그냥 처음에는 그랬는데 반복이 되면서 거기에 평산동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신경을 안 씁니다.
  결정적인 것은 담배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흙을 실으러 가면서 당시에 힘이 좋은데 좋은 흙을 골리려면 산을 다녀야 되는데 현재 국제광학 위에 연병장 그 위치인 줄 아는데 위에 동네입니다.
  그때 흙을 파면 그 당시에 부분적으로 사람 뼈가 나왔습니다.
  큰 소쿠리는 아니더라도 대소쿠리에 반 소쿠리 정도는 부분적으로 이쪽에 흙이 좋은데만 나왔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밑에 굴에 그 관계는 모르고 산에 흙 파러 가면 뼈다귀가 부분적으로 나왔습니다.
  즉 말하면 개울, 도랑 부위에 우리는 그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죄송합니다만 금년에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참고인 정영훈   제가 52년생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 당시에 자택이 평산동 어디쯤입니까?

○참고인 정영훈   평산2동 코발트광산 사택있는 그 동네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 당시에는 열 몇 살?

○참고인 정영훈   처음에는 정확하게 이것이 사람 뼈다 하고 할 때는 15, 16살 때, 그 앞에는 금방 초등학교 졸업해서 13살인데 그냥 해골인가 보다 여사로, 밤으로는 다니면 무섭고 그 정도로 생각했지 결과적으로 담배농사를 지으면서 산에 흙을 파러 가서 보니까 뼈다귀가 부분적으로 뭉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지금 현재 코발트광산 입구에 국제광학 그 장소입니까?

○참고인 정영훈   예, 현재 위치가 국제광학, 동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현재 밑에 한 동, 두 동은 완전히 밑에 있고 세 번째 칸에는 밑에 큰 건물이 있고 큰 건물 위에 보면 현재 창고가 있습니다.
  거기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당시에 코발트광산 꼭대기 입구에 시멘트로 돼 있는 것이 안 있습니까?

○참고인 정영훈   예.

○위원장 정교철   그때 그 부분의 상태는?

○참고인 정영훈   현재 입구에는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고, 그때 당시에 뼈다귀 같은 것이 흘러 다니고 이것이 사람 골 같은 것은 저 위에 있다가도 애들이 만지고 이러니까 밑에도 가고 그런 것은 몰라도 내가 뼈다귀 나온 위치는 현재 그 위에 그 장소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굴에 대한 형태는 본 기억이 안 납니까?
  윗 부분에 올라가면 사각 시멘트로 된 구멍이 안 있습니까?

○참고인 정영훈   예.

○위원장 정교철   그 부분에는 그 당시에 안 가봤어요?

○참고인 정영훈   그때 우리는 그 산 일대를 샅샅이 다 뒤졌지요.
  거의 안 가본 데가 없다고 하면 안 되지만 다 가봤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 상태는 어떻습니까?
  16살 같으면 기억이 날 것인데.

○참고인 정영훈   우리는 그때 그저 사람이 6.25때 그냥 우리가 알기로는 반공포, 어른들 이야기가 우리야 압니까?



○위원장 정교철   다른 위원 질의하실 분 계십니까?





○참고인 김무술   저는 경산시 평산동에 거주하고 있는 김무술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금년에 연세는?

○참고인 김무술   58년생 45살입니다.
  당시 제가 어린 나이에 이 내역을 조금 더 동네에 계시는 나이 많은 사람보다도 조금 더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은 저의 부친이 지금 올해 팔순입니다.
  부친과 아주 친하게 지내시던 분이 지금 고인이 되신 분인데 그 분하고 저의 부친하고 갑장이라고 매일 저녁에 겨울철만 되면 저희 집에 부친하고 이야기하시고 놀고 계시는데 저의 부친이 1.4후퇴 때 월남하신 고향이 이북이고 지금 고인되신 그 분은 동네에 크신 분이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저는 반공법을 굉장히 많이 익혔습니다.
  배우다시피, 스스로 알고 싶고 그래서 지금 고인되신 분은 올라오시면 코발트광산 이야기를 자꾸 해 달라고 그러고 자청해서 자꾸 알고 싶어서 자꾸 캐묻게 되고 아버지 혼자 계시면 아버지한테 이북에서 6.25전쟁 치시는 그런 이야기를 자꾸 듣게되고 이러면서 당시 제가 느끼게 되고 할 무엇이 조금 일제시대 때 감각을 조금 느끼고 할 때는 12살 때 초등학교 5, 6학년 때부터 15살 때까지 중학교 들어갔을 때까지 아주 감정이 북받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까지도 생각나고 할 때가 그 나이였습니다.
  제가 코발트광산 조금 전에 말씀하시던 정영훈 씨 말씀도 있는데 그 위에 코발트광산 사각진 그 자리는 저희들 어릴 때는 놀러가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 앞산에.
  호기심에 놀러가지 마라고 하면 더 가고 싶고 그래서 앞산에 우리 친구들하고 몰래 많이 갔습니다.
  갔는데 사각진 수직갱도 입구에는 밑이 안 보일 만큼 돌을 하나 던지면 한참 후에 물소리가 날 만큼 그 만큼 깊었습니다.
  깊었는데 그 테두리를 저희들은 어릴 때 시멘트로 된 테두리를 뱅글뱅글 쫓아  다니면서 위험한 짓을 많이 하고 했는데 그 뒤에 당시에 지금 고인이 되신 그 분의 말씀에 의하면.

윤성규 위원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참고인 김무술   김자, 우자, 술자입니다.
  저 이름하고 비슷합니다.
  중간자만 틀리고, 비슷합니다.
  그 분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당시 저희는 어릴 때 지금은 보도연맹이라는 것을 알지, 그때 당시에는 빨갱이 사건에 관련된 분이라고 하더라고요.
  빨갱이 사건에 관련된 분이라고 하는데 그 분들을 트럭으로 싣고 와서 트럭으로 싣고 올 때는 올 때 당시에는 동네 주민들 전부 다 못 보게 한답니다.
  못 보게 하고 아예 방송을 하고 동네 주민들은 밖에도 못 나오게 하고 총을 공포탄을 쏘면서 차로 와서 싣고 올 때는 우리 굴비 엮듯이 엮어서 사람을 여덟명씩 묶었답니다.
  묶어서 GMC에 싣고 오면서 싣고 올 때도 사람을 그냥 세워서 싣고 오는 것이 아니고 포개서 싣고 왔답니다.
  그렇게 싣고 와서 그 골짜기에 내려놓고 처음에는 사각 테두리 수직갱도 입구에 여덟명씩 줄을 세워놓고 사격개시하면 여덟명에게 일률적으로 총을 다 쐈는데 나중에 그 총도 쏘기 싫어서 한 방에 쏘면 여덟명씩 다 넘어가게 하고 나중에는 총도 쏘기 싫어서 개머리판으로 팍 찍으면 그냥 막 내려가게끔 그렇게 만들었답니다.
  그것이 고인이 되신 그 분은 아주 상세하게 잘 아시는데 그 위에 골짜기에 사셨단 말입니다.
  유일하게.
  우리 동네에서 제일 위에 골짜기에 사셨기 때문에 그 분들하고 사람 죽이는 사람을 직접 목격했답니다.
  목격을 하면서 사람 죽이는 사람이 눈동자가 틀리더라 하면서, 그 만큼 독한 사람이라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당시에 그리고 뼈는 언제 많이 봤는가 하면 제가 중학교 졸업할 그 무렵쯤 돼서 어릴 때 촌에 골짜기엔 전부 담배농사를 지었습니다.
  담배농사를 지으면서 담배 짐을 지고 내려오면서 중간에 지게를 지고 내려오다가 중간에 세워놓고 밑에 딸기가 엄청 잘 자라 있었습니다.
  그래서 슬리퍼 신고 딸기밭에 딸기 따  먹으러 내려갔는데 나중에 딸기를 실컷 따먹고, 딸기가 엄청 굵고 이 만큼씩 오고 다른 데는 이것만 한데 산딸기가 이것은 굉장히 굵었습니다.
  시커멓게 굵어서 따먹고 올라오는 와 중에 신발이 걸려서 빠졌는데 그것 캐낸다고 건지니까 사람 뼈가 이렇게 엉켜서 그 위에 낙엽이 덮여서 속에 쌓였는데 전부 사람 뼈였습니다.
  두개골이 현명하고 그것도 보고 예사로 보고 지나쳤는데 그것 다음에는 지금 국제광학 그 자리에 지금 터를 다 밀고 없는데 제련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코발트를 녹여서 물을 뺀 자리가 있었는데 시멘트를 가지고 만들었는데 그 자리 바로 옆에는 늘 찬물이 통 속에 갖혀 있었습니다.
  여름에 손도 못 댈 만큼 그 만큼 찬물이었는데 그 속에 스레트가 포개져 있는데 이렇게 한번씩 들여다보면 그 속에 뭐가 있는가 싶어서, 물도 퍼고 어릴 때 속에 보면 갱목도 있고 스레트가 포개져 있는데 스레트 속에 제가 지금 판단할 때는 그것이 아마 핏물이 아닌가 싶은데 스레트 속에 핏물 같은 것이 뭉쳐져 있었고 그리고 사람 뼈가 있었는데 뼈 속에도 물이 차니까 시커멓고 관절부분에는 살이 다 안 썩고 검게 붙어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또 거기보다 그 위에 올라가면 코발트 광산 주위에는 뼈가 많이 널려 있었습니다.
  처음에 어릴 때는 사람 뼈라고 생각을 못 했는데 나중에 뼈를 많이 목격을 하고 난 뒤에는 사람 뼈라는 확신을 갖고 친구 한 사람하고 어릴 때 철이 없으니까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몰라도 땅을 골라놓고 뼈를 전부 주워 모아서 두개골을 청소를 해서 이빨까지 청소를 해서 다 세워놓고 두개골 한 개 놓고 그 다음에 갈비뼈 찾아서 꽂아 놓고 사람 뼈를 해부하듯이 전부다 한 불을 다 맞춰 본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맞춰 보고 어릴 때니까 발로 차 버리고 내 버리고 이랬었는데 그런 이야기도 있었고 저의 부친이 굴 갱도 안에는 저의 부친이 우리 평산동에 내려오셔서 그때 당시는 굴 안에 갱목을 빼서 화목으로 하시고 또 거기에 철로를 빼서 고물상에 팔아서 수입을 잡고 하실 그럴 때 저의 부친이 굴에 많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시면서 한번은 지금 굴 위에 큰 바위에 로프를 묶고 내려갔었는데 그 바위가 굴러서, 두 사람이 내려갔었는데 한 분은 그 굴에서 돌아가시고 아버지만 살아 나오셨는데 아버지 현재 어깨에 여기서 여기까지 상처가 굉장히 컸습니다.
  크게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그 속에 굴 안에 들어가니까 시신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시신이 옷을 입은 상태 그대로 둥둥 물 위에 떠다니는 것을 아버지가 그 굴을 매일 빼러 들어가셔서 한 쪽으로 마른 데로 끌어내 놓고 오셨다는 그런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그 만큼 그 갱도 속에는 사람이 꽉 찰 정도로 그렇게 많이 모여 있었고 그것이 또 아까 고인이 되신 그 분 이야기를 들으면 그 갱위에 수직으로 내려가서 입구로 뚫어 놓은 데 그쪽으로 사람이 일부 나가서 그 분 아까 돌아가신 그 분 호박  밭에 나가서 호박을 따서 먹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고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국제광학 터를 밀고 닦고 할 때는 뼈가 엄청 많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많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고 그 때 당시에 또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묻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또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한 구 한 구 나올 때 처음에는 사람 유골이 나오니까 돼지머리 놓고 고사를 지내고 술도 치고 고사를 지내서 처분을 하고 했는데 그것이 많이 나오니까 한꺼번에 정부미 자루를 갖다 놓고 끌어 모아서 어떻게 처분을 했다는 그런 이야기도 들리고 이런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저는 지역에 살면서 유골을 어떻게든지 깨끗하게 처리를 해 주고 억울한 유족들에게 억울한 피해보상을 해 주시든지 안 그러면 국가차원에서 어떤 보상 기준을 마련해서 그 분들이 억울하지 않게끔 후손들이라도 편히 살게끔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몇 가지 질문을 해 볼게요.

○참고인 김무술   예.

○위원장 정교철   유족측이나 언론보도에 의하면 그 당시에 희생된 민간인이 거기에 약 3,500여명이 된다는 이야기를, 그때 부친이나 김무술 씨를 통해서 희생자가 어느 정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습니까?

○참고인 김무술   그때도 약 3,000명 이상은 사망한 것으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추측인데 그 분도 얼마라는 숫자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여러 수 천명 죽었다, 이런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당시에 말씀하신 것이 빨갱이인데 그 외에 어떤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죽은 사람이 없는지 또 아니면 어디서 어느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왔는지 혹시 그런 이야기는 들은 사실이 없습니까?

○참고인 김무술   그때 당시에 제가 이야기 들은 것은 어느 지서에서 일률적으로 우리가 전쟁 중에 낙동강 전투 지역에 있을 때 우리 빨갱이 사건에 관련돼서 지서에 전부 수감된 사람들이 만약에 전투가 치열해서 터지고 나면 빨갱이들이 다 튀어나가면 좌익세력이 돼서 오히려 우리를 헤치게 한다고 전부 일률적으로 밀어 넣어 놓고 사격을 한 것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내용은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윤성규 위원   그 분들이 다수의 좌익성향에 있는 분들이 많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까?

○참고인 김무술   아닙니다.
  그때 당시에는 억울하게 제가 이야기듣기로는 애기를 업고 들어온 사람도 있고 좌익 관계없이 억울하게 보도연맹에 도장을 찍어주고 갔다고 전부 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굉장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순수한 민간인요.
  그 분도 그렇게 이야기하시고요, 보도연맹이라는 것이 뭔지 모르고 가입을 하고 도장을 찍어줘서 바로 구속되고 사살되고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런데 그 당시에 아까 수송하는 과정이나 또 거기서 어떠한 형태로 학살하는 모습을 봤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참고인 김무술   예, 돌아가신 그 분에 의하면 그 분은 사살하고 하는 지금 말하면 저격수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격수들하고 같이 대화를 했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사람들이 총을 쏘고 한 사람들은 복장은 어떤 복장입니까?
  군인입니까, 경찰관인지 알 수가 있습니까?

○참고인 김무술   그런 내용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군인인지 그것은 안 물어봤으니까, 저는 생각에 군인인지 그때 당시에 어련히 군인이 아니겠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그런 내용은 물어보지를 못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학살당하는 사람들의 복장과 형태는 어떤 상황인지 한번 더 진술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인 김무술   학살당했던 사람들은 그때 당시에 민간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옷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참고인 김무술   민간인 평복, 농촌복이나 그런 복장으로 그때 당시의 평상복으로 알고 있습니다.
  애기를 업고 있는 사람도 있고.

○위원장 정교철   여자도 있다는 말입니까?

○참고인 김무술   여자도 있었답니다.

○위원장 정교철   애기도 업고 있었고?

○참고인 김무술   예, 그런 사람들은 애기를 업고 있는 여자분들도 무슨 보도연맹에 가입돼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보도연맹이 뭔지도 모르고 그런 사건에 관련이 돼서 도장을 찍어 줬다고 해서 잡혀가서 억울하게 죽었다고 그런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인 정영훈   그런데 최용수 씨 같은 분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때 옷을 어떤 것을 입었는지 그런 것은 확인을 잘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인 김무술  


○참고인 정영훈   그때 그 당시에 차 위에 양쪽으로 광목을 덮어서 오니까 오는 것을 볼 수가 없거든요.

윤성규 위원   시간적으로는 어떤 시간대를 많이 했는가요?
  새벽인지 밤인지?

○참고인 김무술   이것은 시간대가 없답니다.
  아무 때라도 그렇게 했답니다.
  언제 사격하는지 총소리만 나면 사격하는 줄 알고 동네 주민들은 아예 방송하면 못 나오게 하고 밖에 일체 못 나오게 한답니다.

김인규 위원   연세가 많은 분들한테 직접 한번 들어봅시다.

○위원장 정교철   어르신 그때 목격하시고 들은 이야기 말씀을 편안하게 한번 해 보세요.

○참고인 권재효   언성이 이래서 죄송합니다.
  한 달이 조금 경과되었는데 지금 약을 먹고 있지만 식도염이랍니다.
  이 염을 못 나으면 식도암의 단계로 넘어가는데 그래서 밥도 못 먹겠고 물도 마시면 따끔따끔하고 말을 크게 못 합니다.
  전에는 말을 청명하고 크게도 하고 했는데 이해해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저 귀동냥만 겨우 들었는데 금새 저쪽에서 이야기하는 분보다 훨씬 적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금년에 연세가 얼마입니까?

○참고인 권재효   77살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당시에 남천에 계셨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예.

○위원장 정교철   남천 어느 동입니까?

○참고인 권재효   남천 신석에 있었습니다.
  신석에 있으며 출입을 못 했습니다.
  왜 출입을 못 했느냐 하면 석방 당시에 경산군 11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데 총계 9명이 석방 됐습니다.
  그래서 서장실로 가서 인사하라고 해서 인도하는 경찰관이 있었는데 그래서 주소 호명하고 인사를 9명이 다 하고 나니까 서장이 하는 말씀이 당신네들은 조사해 본 결과에 진실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겠다 싶어서 석방을 시키는데 내가 석방됐다고 마음대로 다니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근신해서 다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 키우는 부모는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 사람들은 석방 됐는데 우리 아이는 왜 석방 안 되느냐 하며 서에 많이 와서 이야기하면 우리한테 공격을 하면 우리는 사무에 지장이 많은 까닭에 근신, 될 수 있는 대로 근신하라고 해서 도무지 집을 비켜서 동네 밖으로 못 나가게 했어요.
  무서워서.
  일단은 살았는데 잘못하면 죽게 되겠고, 그때 사정이 그랬습니다.
  두 번째 CIC라니, 백골대라니 붙들리면 처참하게 조사할 필요도 없고 죽어 나가고 하는 그런 난 세월이올시다.

○위원장 정교철   그런데 어르신네 말씀하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어르신네는 그 당시에 경산경찰서에 연행돼 왔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예.

○위원장 정교철   그때 9명이 연행돼 왔었는데 경산경찰서 유치장에 있었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경찰서 객금실이라는 데가 있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유도하는 데 거기요?

○참고인 권재효   객금실을 개조해서 거기에 수용시키는데 거기는 50명은 수용하겠습디다.
  벽을 쥐고 돌아앉아도, 옛날 객금실에 수용이 되었고.

○위원장 정교철   그런데 몇 일간 있었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19일, 18일 그렇게 밖에 말을 못 하겠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때 같이 신석동에서 몇 사람이 잡혀 왔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우리 마을에 제 혼자 갔으니까 둘은 경찰서 달포 전에 와서 유치장에 있었고 그리고 한 사람은 대구감옥소로 송청이 되었고 우리 마을 사람이 총계 저하고 넷이지요.

○위원장 정교철   그런데 그 당시에 뭐 때문에 들어갔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이유는 남로당에 가입해서 나쁜 행동한다고.

○위원장 정교철   남로당에 가입했다고 했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예, 남로당에 가입하라고 하는데 실은 도장 준 데도 없고 대답만 했지요.
  우리가 오라고 하면 오너라, 이렇게 되는데 밤에 안 갔습니다.
  어떻게든지 가기 싫고 무시무시하고 그래서 못 간 차제에 성적이 조금 덜 좋게 되었는데 남천면 산전에는 약 40명이 처형을 당했습니다.
  협석에는 약 15명 처형당했고 구일에는 10여명 되지요.
  그러니 산전, 구일 그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운동을 했습니다.
  우리는 밤되면 피해야 되고.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쉽게 이야기하면 그 당시에 운동했다는 것은 빨갱이 운동을 했다는 그 이야기입니까?

○참고인 권재효   예, “남조선 단독정부반대” 그런 날개 붙이라고 하고 “인민공화국 만세” 그런 것을 해서 길가에 뿌리라고 하고, 그래서 길가에 뿌리기는 뭐하고 대번에 뭉쳐서 변소에 집어넣고 나는 주위도 모르고 외동이고 이런데 내가 농사를 못 지으면 가정에 타격을 많이 받지요.
  그래서 밤손님 피하고 낮에는 경찰 피하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작은 외삼촌이 다니러 나왔습니다.
  집에 오셔서 아버지하고 남매간에 이야기로 물론 내 이야기도 했지요.
  하니까 그러면 내가 데리고 갔으면 싶다고 했는데 그래서 일본을 따라가라, 외삼촌 따라서 일본을 가거라, 본국에 삼중현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외삼촌이랑 아무 약속도 없고 그때 돈도 한국화폐 도랑꼬 안에 넣고 신도 일본 사람 군화신고 국방색 옷 아래 위로 입고 여지없이 발견돼서 끌려 나올 쯤 되었지요.
  그래서 부산 바다에 가는데 수심이 타서 일본 구마모토병인데.

○위원장 정교철   어르신네요!
  여러 가지 말씀은 좋습니다만 지금 그 당시에 좀 전에 말씀하신 중에서 신석 뿐만이 아니고 산전에도 많은 분이 죽었다, 붙잡혀 갔다, 어느 동네도 가셨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네요?

○참고인 권재효   예.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어르신네는 그 당시에 빨갱이라고 잡혀갔습니까?
  어떻게 해서 경찰에 잡혀갔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그렇지요.
  도장도 받지 않고 직인도 안 찍고 와 가지고 마을에 와서 이야기하고 가는데.

○위원장 정교철   그때 온 사람이 경찰관입니까, 군인입니까?

○참고인 권재효   같이 산 손님 행세하는 빨갱이지요.
  낯선 사람이에요.

○위원장 정교철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까?

○참고인 권재효   예, 그래서 이야기 듣고는 전부 피시시하지요.
  무엇인가 기분에 안 맞다 이렇게 했더니만 그래서 산전에서 연락병이 우리 마을까지 연락하러 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렇게 오면 거기 간 사람은 결론적으로 처형당했고 안 가고 약삭빠르게 돈 사람은 면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에 전쟁이 일어나고 와서 붙들지 않고 가고 지서에 오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 관에서 오라고 하면 안 갈 도리도 없거든요.
  그래서 내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니까 인솔자 하나 시켜서 경산경찰서로 보내니 경찰서 가니까 바로 유치장에 가두어 버렸어요.
  질문하고 취조도 하고 두드려 패고 이렇게 해서 집에 가라고 할 것 같았는데 그래서 연행돼서 갔지요.
  오라는 대로, 사실 어리석게.
  그때 산전에는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내빼버렸어요.
  그 사람은 살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내뺀 사람 한 사람은 살았고 전부 연행돼서 제 발로 줄줄 서에 온 사람은 다 죽었고요.

윤성규 위원   처형을 당했다는 말씀을 들으셨는데 어디 가서 처형당했다는 것은 들었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예, 그것은 코발트 광산에 죽었다고 보고 또 남천면 금곡에 모약골 못이라고 큰 못이 있습니다.
  그 못 뒤에 묘지가 있답니다.
  거기 구덩이 파서 차곡차곡 앉혀서 죽였다 하는 것은 금곡 사람한테 듣고 ‘아! 금곡에도 가서 죽였구나’ 자인 코발트 광산에는 얼마나 꽉 찼던건가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김인규 위원   그러면 금곡 거기에는 유골 확인을 한번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없지요.

김인규 위원   없어요?

○참고인 권재효   없지요, 없고 마을사람은 알지요.
  이 뒤에 전부 유골이다 하는 것을 알지요.
  얕아서 물도 안 가두고 또 농사도 안 짓고 고지대라서요.
  앞에 깊은 데는 물이 꽉 차 있고.

김인규 위원   그럼 어르신 위치는 알고 계십니까?

○참고인 권재효   위치는 금곡에 가시면 마을사람한테 금곡 못이 어디냐? 못 뒤에 가서 한번 파보자 하면 그것은 다 아는 것이지요.
  명백하게 금곡 못 뒤에 학살시켜서 매장했다 하는 것은 듣고 알고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요.

김인규 위원   그러면 그때 경산경찰서에서 불려 갔던 사람들이 총살당했다 하는 것은 전부 코발트나 금곡 그쪽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그렇게 알면 되겠네요?

○참고인 권재효   예, 그런데 금곡이라는 마을에는 속은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빨갱이가 없어요.
  없으니까 거기는 모른다고 보지요.
  거기 없고 송백, 신방 없고 하도에 없고 흥산에 없고 삼성, 신석, 대명, 구일, 협석 그렇게 빨갱이가 몇씩 있었어요.

김인규 위원   정말로 사상적으로 좋지 않은 분들이 있었다 이 말이지요?

○참고인 권재효   예.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어르신네는 석방될 때는 9명이 같이 석방됐다고 했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예.

○위원장 정교철   그때 한 동네 사신 분들이?

○참고인 권재효  


○위원장 정교철   그럼 경산 어디 자인이나 용성 이런 데 사시는 분이겠네요.

○참고인 권재효   그랬더니 경산군 11면에 어느 면의 사람인지 그것은 모르지요.

○위원장 정교철   남천 분은 혼자 계시고요?

○참고인 권재효   나 혼자 총계 아홉이요.

○위원장 정교철   어떻게 나가라고 했습니까?
  빽이 좋았습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빽은 없지요.
  돈도 안 썼고 이런데 너무나 범죄사실이 없으니까, 억울하지요.
  그것을 알고 또 요소 요소에 아는 사람도 혹 있어요.
  감금해서 두 형사 손에 넘어가서 다 죽어나가니까 그 사람들이 죽어버렸거든요.
  묻지도 못하고 죽어버렸습니다.

이부희 위원   그럼 제가 또 하나 묻겠습니다.
  아까 활동하셨다 이렇게 했는데 6·25 50년 전쟁 이전에 활동하신 제복이었던가요, 안 그러면 6·25 한참 전쟁이 발발할 그 무렵의 아까 말씀한 빨갱이 그런 데서 모여라 한다든지 하라고 했다 하는데 그 시기가 어느 시기에 거기 사람들이 가담됐다고 봅니까?

○참고인 권재효   시기는 6·25동란 전에 저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니까 그래서 행동을 한 사람이 우리 마을에도 몇 있어요.
  무얼 했는가 하니까 높은 산에 가서 불을 놓으라고 해요.
  불 놓으면 그 봉화인데 불 놓으면 여기 불 놓고 저 앞산 높은 데도 불 놓고 산전 뒤에 거기 높은 산에다 불 놓고 협석에도 뒤에 높은 산에 불 놓고 이렇게 했어요.
  불 놓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우리 숨은 인생이지만 남조선 단독정부 반대를 하는 사람이다, 너희 그렇게 알아라 하는 말하자면 협박적으로 감행되는 불이라고 하지요.
  불 놓는 것이야 하나 짐승을 잡는 것도 사람 잡는 것도 아니고 불만 놓고 번지지 않도록 꺼지면 집에 오고 이랬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래도 당해도 마음에 어쩐지 걸려서 안 돼요.
  지하운동하는 게 이런가 싶었고 너무 싱겁고 여럽고 이렇게 하다가 일도 못하고 또 감옥에 가고 이렇게 되는데 그래서 그때 당시에는 서로 인사가 없었거든요.
  밤에 모여서 행동하고 저 사람이 어디 사는지 이름이 뭔지 그것을 몰라요.
  그런데 오면 알게 되면 한 사람 없이 다 빠짐없이 그래요.
  서에 가서 고문을 받는다, 그 고문은 절대적으로 바른 말 안 하고는 못 살아요.
  그러니까 누구는 우리 패다, 누구누구도 같이 행동했다 활활 불게 돼 있어요.
  그렇게 되면 남로당 가입자가 이렇구나, 서에서는 알지요.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어르신네도 고문 받았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나는 안 갔지요.
  안 가니까 산전도 아니고 구일 사람이 우리 말 안 들으면 마을에 까마귀 앉히려고 하는데, 까마귀 앉힌다고 하는 것은 초가집에 전부 불 질려서 앉으면 그게 까맣게 되니까 까마귀 앉힌다 그 문자가 그렇습니다.
  마을 전소시킨다 그래요.
  그래서 하려고 하니까 이리 붙들리고 저리 붙들리고 이것 안 되겠다 싶어서 내 나가서 콩밭에도 자고 고생 많이 했지요.
  그래서 양쪽 주목은 안 받는데 젊은 사람은 안다니까요.
  신석에 누구도 있고 누구도 있는데 왜
 이 사람은 행동을 안 하느냐 그랬답니다.
  우리 군사라고 같이 행동했다고 지껄이면 제 까짓 놈 안 하고 되는가 이렇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일본 외삼촌을 따라가다가 일본 구마모토 거기에서 내려서 미나마다 경찰서에서 차 타고 나오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렇게 체포되는데는 체포 안 될 수 없어요.
  꼬라지가 일본사람 아니고 한국사람 이름 써 놓은 것 한 가지예요.
  신 보고 이름 보고.

○위원장 정교철   일본에서 붙잡혔단 말입니까?
  경산경찰서에 연행돼 가지고 고문 받은 사실 있습니까?
  두드려 맞고.

○참고인 권재효   없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건 없고요?

○참고인 권재효   예.

○위원장 정교철   그냥 10여일 있다가 그냥 나왔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고문 받고 이렇게 되어 있으면 한 사람 없이 처형당했지요.
  그런데 나는 일본 가서 일본경찰한테 붙들려서 쿠주로 감옥생활 하다가 미나모토 나가사키 수용소 거기에 17일 동안에 갇혀 있으니 우리 국민이 천명 넘게 붙들려서 들어와 있었어요.

○위원장 정교철   예, 알겠습니다.

이부희 위원   제가 아까 묻던 것을 종결  짓겠습니다.
  아까 활동하신 것은 6·25전쟁 전에 활동하시다가 그게 죄명이 발각돼서 했느냐 아니면 6·25전쟁 한참 할 때 50년, 51년, 52년, 53년 이 전쟁기간 동안에 활동하신 이런 사람들이 된 것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참고인 권재효   조직적으로 행동 삐라라도 마을에 뿌리듯이 하는 것은 6·25동란 전이에요.

이부희 위원   전이지요?
  전이고 아까 일본 가셨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전쟁 나고 가신 것입니까, 전쟁 나기 전에 일본 가신 것입니까?

○참고인 권재효   전쟁 나기 전에 갔지요.

이부희 위원   나기 전에 가셨다?
  알겠습니다.



○참고인 권재효  


이부희 위원   그럼 해방되고 난 다음에 일본 가셨다 이렇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해방 직후에 6·25동란 전에.

이부희 위원   전에 해방되고 6·25동란 그 사이에 일본 가셨고 활동하신 것도 마찬가지로 6·25전쟁 나기 이전에 해방되고 그 사이에 활동을 하신 거네요?
  동네사람들이.

○참고인 권재효   그렇지요.

이부희 위원   그러면 아까 경찰서에 가셔서 석방됐다고 말씀하셨는데.

○참고인 권재효   경찰서 석방됐는데 그것은 경찰서 두 번 갔어요.

이부희 위원   그것은 일본에서 잡혀서 한국으로 이송됐다 이렇게 보면 됩니까?

○참고인 권재효   그런데 그것은 아무도 경찰관이 와 가지고 체포하고 없어요.
  미리 그대로 자기 집으로 다 가버리고 아무도 경찰이 간섭 안 해요.

이부희 위원   일본에서 다시 잡혀 왔을 때는 불법체류자라든지 이런 것으로 일본에서 돌려보냈다 이것이네요?
  전쟁 범죄라든지 그것하고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렇지요?

○참고인 권재효   그것하고는 관계없지요.

이부희 위원   그러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아까 석방을 하셨다 이렇게 했는데 석방하신 것은 전쟁 끝나고 아마 석방하신 것으로 그렇게 봐야 되겠네요?
  한창 처형하고 경찰 신문하고 그 이후에 나오셨네요?

○참고인 권재효   그렇지요.
  정말로 석방된 것은 4년 후고.

이부희 위원   그렇지요?

○참고인 권재효   1차는 일본 갔다 와 가지고 또 자꾸 행동하자고 하니 어떻게 할까 싶어서 했고 또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냐 나는 자수한다 그래서 경찰서 가서 자수했어요.

이부희 위원   그러면 자수한 것은 몇 년도쯤 됩니까?

○참고인 권재효   4년 전에 가서 자수하고 나니 나는 여기하고 여기하고 이런데 범죄사실은 한 건도 해온 일이 없습니다 하니까.

○위원장 정교철   왜 자수했습니까?
  아무 죄도 안 지었는데 뭐하려고 자수했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저쪽 빨갱이라고 자꾸 신고하면 잡아갔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그리고 자기네들 행동 안 하면 저기도 같이 했다 이렇게 돼요.

김인규 위원   물고 들어가는구만.

○참고인 권재효   그렇게 막 물고 들어가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처음 경찰서 가 가지고 한 1시간 가량 됐는가 조서 받고 나가라고 해서 나왔지요.

○위원장 정교철   두 번째는요?

○참고인 권재효   나와 있다가 보니 조금 있다가 6·25동란이 발발됐어요.
  그렇게 되니 지서에도 모두 오라고 해요.
  과거 자수자 전부 여기 오너라 이랬어요.
  그래서 모두 갔지요.
  가니까 차로 경산을 이송해라 이렇게 됐어요.
  간 사람은 전부 다 죽었어요.

○위원장 정교철   그때 어르신은?

○참고인 권재효   안 갔지요.
  나는 경산 서에 가서 자수했는데 나는 안 간다 이렇게 하고 안 갔지요.
  안 가니 남천지서에서 왜 남천지서에 안 하고 경산 서에 자수했냐 말로 그렇게 걸었습니다.
  그래서 남천지서에 자수하게 되면 대번에 알게 되니 밀고자가 있으니 아무도 모르게 내가 자수한다, 그래서 경찰서에 가서 그 목적으로 자수했는데 내가 자수를 잘했지요.
  한번 두드려 맞지도 않고 조서만 조금 꾸미다가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6·25동란 나고 난 후 자수자 오라고 이렇게 하면 내가 안 가면 또 주목받거든요.
  나는 그런 행동도 없고 자수했는데 왜 오라 가라 이렇게 합니까? 그 말도 못합니다.
  남의 말도 한번 들었으면 자수자지 뭐하고요.
  그래서 자수자로 명칭을 억울하게 찍혔지요.

이부희 위원   제가 종결지을게요.
  현재 우리가 주제는 무엇인가 하면 6·25동란 이후에 코발트 광산에 민간인 학살사건 이 취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현재는 6·25사변 동란 나고 난 다음에 과거에 행동했던 이런 사람들이 자수라든지 지서 오라고 했다든지 이런 사람이 현재 불려갔단 말입니다.
  불려갔으면 그 사람들이 지서에서 해서 경찰서로 이송해서 다른 데 갔다고 합니까, 안 그러면 코발트 광산 쪽으로 바로 갔다고 합니까?
  그런 이야기는 혹시 들은 적이 있습니까?

○참고인 권재효   그것은 들은 것 외에 내가 석방돼 나올 때 감옥소에는 조그만 시장이 있어요, 경찰서에.
  20살 정도 먹은 여성이 어린애 업고 하나 서 있고 그 다음에는 머슴애들은 전부 이렇게 끼어서 촉촉촉촉 앉아 있어요.
  우리는 서에서 석방돼서 나오며 신을 찾는데 신 벗어놓고 갔더니 그 위에 포개고 포개고 어떻게 많은지 시간이 걸립니다.
  감옥에서 바로 곁에 내다보고 그것은 건드리지 마소, 내 신이구만.
  내가 남의 신 신고 갈까봐요 내 신 찾지.
  그렇게 됐는데 내가 나가고 난 뒤에 며칠 안 돼서 5일도 안 넘어서 코발트 광산에 총살이 계속해서 났는데 따다다다 따다다다.
  나는 총 소리를 듣고 아, 이제 다 처형시키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했지요.

이부희 위원   예, 마치겠습니다.

김인규 위원   어르신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그 분들이 실질적으로 우리가 속된 말로 빨갱이보다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참고인 권재효   억울하게 죽었지요.
  우리 마을에 셋은 말 잘못해서 죽었고 그런 행동 안 했고 둘은 사찰대 김형사한테 호출을 받았는지 경산 서에 있다가 대구로 송치되니까 우리 마을 사람이 셋이거든요.
  하나는 행동도 안 하고 그 사람이나 나나 안 하고 둘은 행동 좀 했고 이랬는데 그래서 살아 나온 사람이 최상익, 감옥에 같이 있었던 정만식하고 전시한하고 같이 있었나?  그래 같이 있었다, 같이 있으니 총살, 어느 해 어느 몇 일날 총살한 것 아나, 해서 그것은 모른다, 둘이 불러내는 것만 알지 둘이 불러내고 난 뒤에는 감옥에 들어오지도 않더라, 그 후에 총살 맞아 처형당했고 내가 들어 억울하게 간 사람은 대구에서 몇 해 때 석방돼서 나와서 너 참 명 길다, 거기는 감옥소 귀찮스럽다고 처형시키는데 그 석방배경이 올바른 석방이다.

○위원장 정교철   어르신 목도 아프신데 수고 많이 했습니다.
  더 증언하실 분 하실 분 있으면 증언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없으면 우리 위원님 더 질의 있으십니까?
  (「없습니다」하는 위원 있음)
  없으면 이상으로 오늘 오전 시간에 계획된 증언자의 증언을 모두 청취하였습니다.
  오늘 오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점심을 드시고 가시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다 같이 점심을 준비해 놓았으니까 점심 드시고 가시도록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오전 일정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12시10분 회의중지)

(14시07분 계속개의)


○위원장 정교철   의석을 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속개하겠습니다.
  오전에 이어서 오후에는 유족측 증언을 청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본 특위 청원심사활동 중 오늘 증언청취가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증언되는 내용은 기록되어 본 특위 청원심사 활동과 향후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에 이념적 갈등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발생되었으나 5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정말 가슴이 아픈 민족 상잔의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이념적 갈등을 떠나 인도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증언하시는 분들은 기탄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당시 사건에 대하여 과장되거나 거짓없이 알고 계시는 대로 소상하게 말씀하여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말씀하실 때는 먼저 증언하시는 분의 주소, 성명을 말씀해 주시고 그리고 나이도 같이 말씀해 주면 좋겠습니다.
  사건 당시 시기와 장소, 피해자의 상황, 가해자 학살형태 등을 육하원칙에 의거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의진행은 먼저 증언하시는 분들의 증언을 듣고 난 뒤에 본 특위 위원님들께서 보충질의하실 사항이 있으면 질의 답변하는 방법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앉은 순서대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첫 번째로 경산시 남천에 계시는 태윤희 어른께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앉으십시오.

○참고인 태윤희  


○위원장 정교철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참고인 태윤희   지금 68세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주소가?

○참고인 태윤희   주소가 그 당시에는 경산군 남천면 신방동 그렇게 불렀습 니다.

○위원장 정교철   신방동요?

○참고인 태윤희   532번지.

○위원장 정교철   532번지.
  그때 직업은?

○참고인 태윤희   그때 나는 직업이 없고 그때 내 나이가 15~16세 그렇게 됩니다.

○위원장 정교철   예.
  그러면 지금 현재 가족 중에서 어떤 희생자가 계십니까?

○참고인 태윤희   그 당시에 내 나이가 좀 어렸고 증조모, 조모까지 모시고 있었고 우리 엄마까지 있고 그 밑에 동생들 셋이 있었고 부양가족이 그렇게 됐었습니다.
  옆집에 삼촌들 두 분이 계시고 제가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건 이후로는 제가 가장으로 맡아 가지고 모시고 여태까지 돌아가시고 제가 혼자 남아 있는데 내게 딸린 가족들하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상황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윤성규 위원   희생자와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참고인 태윤희   저의 부친됩니다.
  내가 그 당시 어릴 때 전체적으로는 몰라도 우리 동네를 비롯해 면 일대 이렇다 저렇다 확실히 육하원칙에는 내가 몰라도 그 이야기를 듣고 또 그런 상황을 내가 직접 희생을 하고 있다가 보니까 좀 듣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에 구장이라고 했는데 동장을 그때는 구장이라고 했습니다.
  구장을 그때 그 당시에 맡아서 동네 일을 봤는데 그 당시에는 전쟁을 하기 전에 저쪽에서 전국적으로 게릴라군들이 이런 식으로 분포가 돼 있었어요.
  있으면 그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서 우리가 말하기를 산 손님, 빨갱이 이런 식으로 집단이 컸어요.
  커 가지고 밤으로는 동네에 내려와요.
  내려와 가지고 쌀이면 쌀, 기타 닭이면 닭 이런 것까지 뺏어가 가지고 저 산골에 가 가지고 자기들 해 먹거든요.
  밥을 해 먹고 가고 또 날 새면 이동해 버리고 없고 그리고 낮에는 경찰이 나옵니다.
  나와서 수색하고 밥을 해 먹고 간 그 자리도 우리가 볼 수가 있었고 또 그 사람들이 직접 밤에 와 가지고 활동하는 것도 우리가 그때 보면 알았어요.
  장총도 들고 오고 여러 가지 이런 형태를 가지고 와 가지고 그때 우리 아버지가 동장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우리 집에 주로 많이 왔어요.
  와 가지고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동장을 불러 가지고 어떤 이야기도 하고 그런 요구사항도 하더라고요.
  쌀을 좀 거두어 달라든지 그때는 할 수가 있습니까?  쌀도 거두어야 되는데.
  그런 일도 있었어요.



○위원장 정교철   그 때가 언제쯤 됩니까?

○참고인 태윤희   그때 그러니까 6·25전이에요.

○위원장 정교철   예.

○참고인 태윤희   그래서 쌀을 거두어 주기도 하고 동민들하고 했는데 낮에 수사대에서 와 가지고 어떻게 됐느냐 하면 맞기도 하고 찔리기도 하고 이런 경우가 있었는데 우리 측에서는 절대적으로 이건 동장 책임으로서 동네를 위해서 불가피한 사정이라 안 주면 안 된다고 동네를 불도 지를 수가 있고 사람을 불러다가 죽일 수도 있고 이런 경우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해서도 해 주어야 되고 당사자가 살기 위해서도 해 주어야 되고 그것은 할 수 없는 겁니다.
  사상이나 이런 것을 떠나 가지고 그런 경우도 있었는데 그렇게 해 주었어요.
  그렇게 하다가 고발 아닌 그런 수사가 들어가고 상대방에서 그 당시에도 관계 좀 덜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발을 해요.
  어제 또 왔다, 동장이 군에 보고를 했는가 안 했는가 이런 것까지 전부 추적 조사도 하고 그런 사정이 있었는데 그래 가지고 우리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어떤 죄명인가 그때까지는 확실히 몰라도 경찰서까지 가고.

○위원장 정교철   경산경찰서요?

○참고인 태윤희   예, 남천지서로 해 가지고 서에 가 가지고 대구법원까지 갔습니다.
  가서 그 경우도 이야기하고 법원에서 집행 넘어가는 중에 그때는 집행유예라고 하던가 이런 식으로 해서 이 사람은 죄가 없다 불가피한 경우에 이렇게 됐으니까 무죄를 받아 가지고 집에 갔어요.
  집에 나와서 한 1년 전쟁 전인가 그때 사정이고 집에 와 가지고 집의 일도 하고 농사도 짓고 그래서 살았는데 그리고 전쟁이 사실 났어요.

○위원장 정교철   6·25전쟁?

○참고인 태윤희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래서 우리들은 생각을 아무도 못했지요.
  그때 전쟁이 나서 그런 것은 좀 없어 가지고 소탕되고 했기 때문에 별 사항이 없었기 때문에 농사일을 다시 하고 집안일 돌보고 이럴 때 6·25가 났는데 그때 내가 알기로는 농사철이기 때문에 끝나고 논에 남은 일이 있고 이래서 들에 일하러 가셨는데 호출이 왔었어요.
  그래 가지고 우리 아버지가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어 가지고 불려갔다 이렇게 생각해서 옷 갈아입고 지서를 갔어요.
  간 그 길이 마지막 길이에요.



○위원장 정교철   그게 그러면 몇 년도 몇 월경쯤 되겠습니까?



○참고인 태윤희   6·25나고 7월쯤 바로.

○위원장 정교철  


○참고인 태윤희   날짜는 내가 정확하게 잘 모르겠는데 한 7월경입니다.
  그래서 갔는데 뒤에 소문 듣기는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촌 아닙니까?
  그때는 경산도 상당히 촌 형태를 못 벗어서 정보도 얻을 수가 없고 그렇게 있는데 그 소문에 6·25는 어디까지 왔나 하면 대전 왔을 거예요.
  막 내려오고 하는데 그렇게 소문이 군용차 가지고 수많은 사람을 싣고 경산에 차가 하루에 몇 대가 지나간다, 이런 소문도 있었고 그러나 우리는 그때 상황에서는 조사할 방법도 없고 가만히 앉아서 상황만 봤지 별 그것은 우리가 못했어요.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논에 일하실 때 파출소에서 연락 왔습니까?

○참고인 태윤희   아마 그래요.

○위원장 정교철   지서에서요?

○참고인 태윤희   예, 지서에서요.

○위원장 정교철   그럼 남천지서가 되겠네요?

○참고인 태윤희   예.

○위원장 정교철  


○참고인 태윤희   본인이 갔어요.
  출두해서 오라고 하길래 간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소문 들으니까 전부 실려갔다.

○위원장 정교철   그 후에 어른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지 않았습니까?

○참고인 태윤희   노력도 못해 봤어요.
  할 방법도 없고 우리는 그 당시에는 말도 못하고 사니까 지나간 것이지 대구감옥에 있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을 불러다가 트럭 대고 싣고 간다, 그리고 평산 거기 가면 핏물들이 흘러 내려가고 별별 그런 게 있다, 그래서 겁이 나서 그런 데 가보지도 못했어요.
  그때 군인이 총 들고 다니는데 누가 갈 수 있어요.
  가면 같은 사상범으로 몰아 가지고 말 한번 잘못하면 요새 식으로 고문이 따로 있습니까, 했다 그러면 와리깡으로 죽이고 했다 그러면 죽이고 그런 식입니다.
  막상 급하면 너는 이 놈의 자식, 우리한테 동조 안 하니까 죽어야 된다면서 죽이고, 빨갱이를 동조한 사람은 빨갱이라고 죽이고 그래서 그 당시에는 동네 사람들 전부 보따리 하나씩 가지고 나오라고 해요.
  앞에 들에 가면 벌리라고 해요.
  그러면 옷 보따리 빨간 것도 있고 분홍 것도 있고 이것은 누구 것이냐 이것은 너희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동네 사람 고문하는 거예요.

윤성규 위원   고문하는 사람들은 누구예요?

○참고인 태윤희   군인들입니다.

윤성규 위원   군인이고.

○참고인 태윤희  


윤성규 위원   잠깐만요, 어른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참고인 태윤희   태수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우리가 보면 동네 삼삼오오로 젊은 사람들을 불러다가 집주위 으슥한데 옛날에는 가면 나무토막이 받쳐져 있었어요.
  그런 데서 엎드려뻗쳐 해 놓고 막 죽는다고 고함 소리가 나고 두드려 패고 이런 것은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고 듣고 했어요.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아버지의 행방을 그 동안에 가족이 찾아본 사실도 없고?

○참고인 태윤희   없습니다.
  그 뒤로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정을 했지요.
  돌아가셨으니까 우리는 어디 가서라도 누구한테 구원할 그런 필요성도 없고 우리 생각에 확실히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 버렸어요.
  그 당시에 소식이 한 개 없으니까.
  그래서 뒤에 경찰서에 한 3일간 있다가 갔다고 하는 그런 소문은 들었지 그 외에는 들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코발트 광산으로 끌고 갔다?

○참고인 태윤희  


이부희 위원   그럼 제가 하나 질의하겠습니다.
  다른 분도 마찬가지인데 혹시 여기 계신 분은 전부 누구거나 관계없이 여기 학살사건에 연관이 되시는 분은 다 맞지요?

○참고인 태윤희   그렇지요.

이부희 위원   그러면 현재 우리가 주로 알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위에 관계되는 사람 아버지도 될 수 있고 아들도 될 수 있고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되는 사람이 평산동 코발트 광산에서 학살이라든지 희생이라든지 어떤 방법이라든지 거기에 됐다고 확정이라든지 그렇다 이렇게 혹시 알고 계시는 분이 있느냐 그게 제일 중요하거든요.
  추측이 그 당시에 거기에 가지 않았겠나 그것말고 우리는 확실하다 이렇게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건 없지요? 
  (「있습니다」하는 이 있음)
  그것은 나중에 하고 우리가 할 것은 그 당시에 사건에 제주도에서도 희생되었다든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한정돼 있거든요.
  6.25한국 전쟁사 내에서 코발트 광산에서 누구든지 우리의 가족이라든지 동생이든지 누구나 거기였다는 테두리에서 해 줘야 되거든요?
  그런 것을 혹시 말씀을 돌아가면서 하실 때 그 점을 해 주시면 우리가 중점적으로 조사를 해 드릴게요.

○참고인 태윤희   나 같은 경우에는 육감적으로나 듣는 면으로나 갔다는 것이 확실해도 증거는 없지요.
  차에 싣고 빠진 목격도 없고 그 이후로 그렇다고 해서 수사기관에 가서 조사를 받는다고 하면 소문이 있을 것이고 또 어디에 갔으면 개구리 소년처럼 나타나기를 나타나야 되는데 그것은 완전히 사망신고까지 중간에 다 했고 주변에 내 연고되는 아는 사람들은 아무개는 그때 그 길로 거기 갔다는 것을 다 알고 지금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부희 위원   들어 보니까 태윤희 선생님께서는 그 당시에 희생된 것은 맞지만 평산동 코발트에서 희생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른다는 이 말씀이지요?

○참고인 태윤희   그것은 확신은 하지요.



윤성규 위원  


○참고인 태윤희  


이부희 위원   일단은 희생된 것은 사실인데 평산동 코발트는 맞는지 안 맞는지는 확실히 모른다는 그 말씀이지요?

○참고인 태윤희  


이부희 위원   그것을 우리가 심도있게 갖춰야 할 부분이 그 부분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지금 전반적인 정황을 대충 알겠습니다만 오전에도 우리가 세 분에게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연행된 이후에 가족들이 부친이 돌아가신 어떤 상황들을 경찰서나 어떤 기관에 물어본 사실은 있습니까?



○참고인 태윤희   그때는 어느 누구한테 물어볼 곳도 없고.

○위원장 정교철   지나고 난 후에, 지금도 돌아가셨는지 아닌지 지금은 돌아가신 확정은 연령적으로 증명이 되지만 그 이외에 우리 어른은 어떤 방법에서 어떻게 행방불명이 되었는지 조사해 본 사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참고인 태윤희   조사해 본 사실은 우리가 직접 해 본 일은 없고 그 당시에 그때가 이승만 정권 끝나고 할 때 그런 사람은 신고를 하라고 해서 그 당시에 우리 아버지는 신고를 했어요.



○위원장 정교철   사망신고는 어떻게 했습니까?

○참고인 태윤희   사망신고는 몇 년 후에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없어도 사실은 그렇게 된 것이고 모든 사람이 확실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어디에 숨었다가 살아 나올 수도 없고 이럴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사망신고를 했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몇 년도에 했습니까?

○참고인 태윤희   그때 모친께서 했는데 나도 중간에 이런 사항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한테 가서 자문도 얻을 수도 없고 그래서 속앓이만 하고 그래서 지금까지 지나온 것뿐이지 날짜까지는 확실히 잘 몰라요.

○위원장 정교철   다른 말씀하실 것이 있습니까?

○참고인 태윤희   나 같은 경우는 그 이야기뿐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참고인 정화섭   저는 그 당시 17살이었습니다.
  우리 형님은 나보다 4살 위였으니까 그때는 21살이었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지금 연세는 어떻게 됩니까?

○참고인 정화섭   지금 70입니다.
  그때 경산 백천1동에 샘골이라는 곳에 거기에 민족청년단이라고 훈련받으러 나오라고 경산 단장이 박 무엇인가 그 분이 했어요.
  그것 증명할 수 있는 것도 다 불사르고 학교 졸업장이고 뭐고 다 불살랐어요.
  그렇게 있었는데 무조건 나오라고 하고 동장, 반장은 무조건 철도경찰이나 지방에 백골대라면서 나오고 해서 동장, 반장 모아서 무조건 집집마다.

○위원장 정교철   그때가 6.25전입니까?
  6.25발발하고 입니까?

○참고인 정화섭   6.25발발하고 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지금 희생된 분이 누구입니까?

○참고인 정화섭   우리 중씨됩니다.

○위원장 정교철   성함을 아십니까?

○참고인 정화섭   정규섭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때 연세가 얼마쯤 됩니까?

○참고인 정화섭   그때가 21살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참고인 정화섭   학교는 남천초등학교.

○위원장 정교철   그 이상은 안 했고요?

○참고인 정화섭   예.

○위원장 정교철   그런데 이 분이.

○참고인 정화섭   결혼하고 이내 그렇게 됐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6.25발발하고 바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습니까?

○참고인 정화섭   예, 집에 어머니는 음력 6월 8일에 집 나갔다고 그날 제사를 모시고 큰집에서는 안 하고 재산은 큰 집에 전부 다 갖고 가고 형님 밑으로 해 놓은 것 등기등본에 부친이 다 해 놓은 것을 큰집에서 제사에 물이라도 한 그릇 떠놓으라고 하니 안 해서 나는 형제간 도리로써 6남매 막내인데 누님 셋, 형 둘이고 그런데 백씨는 오끼나와 징용가서 살아 나와서 몇 달 안 살다가 죽었어요.
  고생도 많이 하고 미국 하와이 있다가 고생 많이 하고, 그래서 그 형이 훈련 갔다고 오고 했는데 불러내서 나오고는 소식이 없는데 그래서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경찰서에 가 있다고 했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불러간 날이 언제쯤으로 기억을 합니까?

○참고인 정화섭   그것이 음력 6월 8일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6.25사변 터지고 바로입니까?

○참고인 정화섭   바로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음력 같으면 8월쯤 되겠네요?

○참고인 정화섭   양력 7월쯤됩니다.
  그런데 우리 서너살 더 먹은 사형뻘 되는 권재호라는 그 분은 같이 가서 경찰서에 한 방에 있었는데 아까운 사람 죽었다고, 하나도 죄 없는 사람을, 그때는 무조건 우리 자형들도 똑똑하고 내 외사촌 형님도 남산지서 파출소장 했고 신원철 안 있습니까?
  내가 속으로는 그 형님이 폐인이 안 되었나, 그때 파출소 있었으면 죄 없다고 하든지 죄를 세우든지 사람들 죄 없는 줄 알고 무조건 내 줬는데 그때 신원철 형님이 돈 먹으려고 했으면 막 먹었어요.



윤성규 위원   잠깐만요!
  권재호 씨라고 했습니까?
  그 분은 그런 소리를 안 하던데?

○참고인 정화섭   같이 한데 있었어요.

○위원장 정교철   한 분 같이 그 이야기가 나왔어요.

○참고인 정화섭   그래서 거기는 소 한 마리 팔아서 자기 아버지가 신석에는 밑에 과수원 사과나무 산비탈에 있어도 산나무하고 머슴 하나 하고 안 바꿨습니까?
  협석에 정재봉이라는 사람이 남의 집 살고 했는데 그 사람은 소 한 마리 팔아서 자기 아버지가 붙들어 내고 그때 돈만 주면 무조건 죄 없는 거 자기들이, 자유당 시절에 죄 없는 놈 두드려 패서 한 놈 빠지는데 코에 물들이고 하면 안 가겠어요?
  그래서 말을 들으니 전부 달성 광산에 갔다, 남천 한 씨네들, 못 있는데 못 안에 거기도 많이 갔어요.
  거기도 경찰서에서 바로 싣고 전부 묶어서 그때도 고개 숙이라고 하고 하니 어떻게 압니까?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당시에 남천지서에서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었겠네요?

○참고인 정화섭   예.

○위원장 정교철   이송돼서 권재호 씨도 역시 한 동네 사셨는데.

○참고인 정화섭   옆에 신석동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런데 두 분이 같이 들어갔는가요?

○참고인 정화섭   같이 들어갔지 싶어요.



○위원장 정교철   권재호는 나오고?

○참고인 정화섭   나와서 지금까지 살은 원인은 산에 가 있고 자기 아버지가 몰래 산에 밥도 갖다주고 이래서 살았지요.
  외동아들.
  우리 아버지는 자식이 많아서 그렇지만, 우리 자형들하고는 다 연세도 많고 딸이 위로 셋인가 그런데, 우리 자형들이 설쳐서 소 한 마리만 팔아서 넣으면 자식 구할 것인데 하지도 않고 그냥 후회만 하고 있고, 죄라도 지었으면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무슨 그것이 하나도 없다고요.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연행되기 전에 민병대, 뭐라고 했습니까?

○참고인 정화섭  


윤성규 위원   그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좌익, 우익으로 볼 때 우익으로 봅니까?

○참고인 정화섭   모르지요.

윤성규 위원   방위대라는 것이 국군의 유사한 것입니까?

○참고인 정화섭   쉽게 말하면 국군의 보조역할을 했습니다.



김인규 위원   그러면 그때 그 당시에 남천면 일부라든지 경산 주위에서 정말로 사상적으로 나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까?

○참고인 정화섭   그때 우리말로는 산전에 최 무엇인가 그 분이 제일 오야지인데, 그 사람은 하다가 어떻게 피했는지 피해서 군에 입대해서 나와서 돌아다니면서, 그 사람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름을 모르겠어요.
  거기는 우리 중씨하고 나이가 비슷하거나 그럴 것입니다.
  했는 사람은 지금 살아 있지만 거기는 지리산 부사령관이라는 오해덕 씨는 지리산에서 붙들려서 그때 우리도 들었지만 라디오 방송까지 나오고 그때 나온 상이군경이라며 버스를 타면 공차도 타고 증명서 안 줘도 한쪽 팔이 없으니, 먼저 장애자 할 때도 작년에 내가 가니까 와 있더니 불안하든지 조금 앉았다고 들어오니까 달아나고, 저런 사람이 장애자라고 하고 있으니 자기가 먼저 가고 없습디다.

○위원장 정교철   다른 말씀하실 것 없습니까?

○참고인 정화섭   예.

○위원장 정교철   다음에는 정영호 어른께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인 정영호   저는 그 당시 6.25때는 경산시 남방동 289번지에 살았습니다.
  현재는 청송군 현동면 개일리 5번지에 사는 정영호라고 합니다.

○위원장 정교철   금년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참고인 정영호   70입니다.
  아까도 이야기가 나왔지만 청년방위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조직이 평산에 생긴 것이 약 7월 10일경에 시작해서 15일경에,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 사이에 생겨서 우리가 청방교육을 매일 받으러 갔습니다.
  한번은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밤에 그때 옛날 평산 코발트 광산에서 사용하던 2층 건물이 있습니다.
  사무실이 있는데 그 앞에 조그마한 비품창고가 하나 있어요.
  그저 사람 열 다섯, 여섯 수용할 수 있을 것인데 앉으면, 삼십명을 수용해서 죄수를 넣었는데 그 이튿날 훈련받으러 가니까 우리 형이 거기에 왔더라고요.
  형이 어디서 왔는가 하면 남천 협석 맞은편에 구일동에 피신해서 있었습니다.
  죄가 있어서 피신한 것이 아니라 매일 경찰들이 마을에 순회 오면 들여다보고 요즘 뭐 하느냐, 매일 귀찮아서 거기에 가서 살았는데 그래서 그때 쌀값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만 사진 한 장에 쌀 두 말정도 돼요.
  그때 농촌에 가을해서 쌀 먹을 것 없습니다.
  거기에 20되가 배부되었습니다.
  이것을 왜 주는가 물으니까 사상자 집에는 준다 이럽니다.
  다른 데 입 떼면 그냥 안 있겠다, 이러거든요.
  그때 자유당 때 부정도 많았지만 형편  없었습니다.
  울며 겨자먹기로 이것을 한꺼번에 다 주면 안돼요.
  한꺼번에 다 주면 또 어디갔나, 잔소리하기 때문에 오늘 다섯 말 주고 한 열흘 있다가 또 주고 이렇게 끌어가면서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 있었는데 그 이튿날 가니까 어디로 갔는지 여기 평산에 왔더란 말입니다.
  평산 왔는 것이 뭔가하면 여러분 잘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압량이 본부인데 압량은 그때 민사처장이 있었고 CIC대장이 있었고, 헌병대장이 3개가 있었습니다.
  CIC 2층 사무실에 파견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말이 청년방위대이지만 CIC는 징역을 받아야돼요.

○위원장 정교철   그 이야기는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그러면 코발트 광산에 2층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가 CIC파견대가 거기 있었단 말입니까?

○참고인 정영호   예, 파견대가 있었고 우리는 훈련장소가 거기였습니다.
  연병장이 좋았고.

○위원장 정교철   훈련은 그때 명칭이 어떻게 해서 무슨 단체입니까?

○참고인 정영호   17세이상, 25세까지, 31세까지인가 그런데 청년방위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어디 다리 넘어 입니까?

○참고인 정영호  


○위원장 정교철   예, 그때 연탄공장이 있었습니다.

○참고인 정영호   연탄공장 맞은편 거기가 지대이고 편대는 압량이고요, 우리는 소대입니다.

윤성규 위원   그런데 그것은 자원입대입니까, 징집상태입니까?

○참고인 정영호   무조건 연령이 해당되면 가야지, 어느 빽으로 안 갑니까?

윤성규 위원   군에도 갈뿐더러 거기가는 사람도 있고?

○참고인 정영호   그렇게 뽑아서 지대에서 연락이 옵니다.
  각 소대 인원을 데리고 오너라 하면 우리가 전부 부대에 갑니다.
  정렬해 있으면 곁에 오면 경례 붙이고 관등성명을 댑니다.
  그러면 너! 너! 하면 그것은 차출되어 가는 것입니다.

윤성규 위원   군데 간다는 말이지요?

○참고인 정영호   예, 군대에 가야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군 보조입니다.
  그때 제가 만 17세입니다.
  해당이 되죠.
  그리고 방위대도 두 가지로 구분이 돼 있어요.
  정 있고, 예비가 있고.
  나는 예비반이고 예비반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나이가 어리면 예비반이고 나이가 성숙한 사람은 정규반이라 해서 두 가지 명칭을 해 놨는데, 그래서 2층에 부르면 하층에는 어제께 회장님하고 답사하러 가니까 집을 다 뜯고 지서도 뜯고 없습니다만 나지막한 집이 있어서 연병장에서 훈련을 받으면 차 올라가는 것은 안 보입니다.
  이층에서 비가 오던가 하면 2층에서 군가 매일 부르고 안 그러면 날이 좋으면 연병장에서 제식훈련 받고 이러는데 2층에서 보면 요즘은 차가 다양하기 때문에 차 소리 들어도 모르지만 그때는 차가 부르릉하면 한 대 올라가고, 한 대 올라가고 어디서 집단적으로 해 놨다가 배차시키는 것이 보통 한 시간마다 한 대씩 올라갔어요.

○위원장 정교철   그때가 6.25전입니까?

○참고인 정영호   6.25 나고, 그 해입니다.
  그러니까 6.25가 6월 25일에 났으니까 이것은 7월 20일경부터 계속 있었습니다.
  계속 올라오는데 우리가 숫자를 헤아려볼 때 8대 내지 9대가 올라옵니다.
  그러면 오는 시간이 대충 그때 우리 짐작에 어디서 오는지는 몰라도 정확히 한 시간정도 되면 하나씩 옵니다.

○위원장 정교철   아침부터요?

○참고인 정영호   예, 아침 9시되면 하나씩 옵니다.

○위원장 정교철   9시경에 오기 시작한다는 말이지요?

○참고인 정영호   예, 그러면 언제까지 오는가 하면 저녁 5시까지 오거든요.
  보통 가면 사격을 45분 내지 50분을 합니다.
  이것은 들리는 소리로요, 내 따다다다, 쿵쿵합니다.
  그렇게 해 놓고는 10분간 휴식입니다.
  10분간 총소리가 안 납니다.
  여러분, 그때 우리가 만 17세 같으면 아주 호기심이 많을 때고 요즘 같으면 아주 저럴 때 아닙니까?
  그때는 총부리가 겁이 나서 말도 못하고 공산국가 한 가지입니다.
  그때는 친하지 않으면 말 못 했습니다.
  아까 저 분이 이야기했지만 그때 말 나온 것이 도둑놈이 도둑놈 잡고 빨갱이가 빨갱이 잡는다는 문자가 그때 나온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분이 빨갱이 아니면서 내가 잡혀서 순사한테 모욕당할까 싶어서 전부 빨갱이 같다하면 이 사람 잡아가거든요.
  그런 세월입니다.
  여러분 그때 나이 많으신 분들한테 물어보면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남방에 김용구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를 해 보니까 고인이 되고 없어요.
  그 사람이 내 보다 5살 더 많이 먹었는데 그 사람이 전투에 가서 팔까지 다쳐서 상이군경으로 나온 사람인데 군대 가기전까지 청방에 같이 있을 때, 그때 우리 남방에서는 우리 둘밖에 없었어요.
  둘이 갔는데 내가 호기심이 많아서 총 쏘는 데 구경 한번 가자, 너 맞아 죽으려고 그러냐, 그때 누구 말처럼 그 장소 잘못가면 빨갱이로 몰리면 용서 없습니다.
  호기심이 많아서 어디를 갔는가 하면 사동 넘어가는 코발트 광산 사택이 길게 있었어요.
  그래서 이쪽에 숨어가서 들방 못 밑에 운동장이 크게 있었잖아요?
  그것을 피해서 산 넘어가는 체 하면서 구경을 했습니다.
  바로 길 밑에 내려놓고 어떻게 하는가 하면 그 사람들이 군기 잡으려고 앉아! 일어서! 하면서 포승줄로 묶고 팔을 눌러서 도망도 못 가겠습디다.
  그렇게 해 놓고 앉아! 일어서! 하면서 그렇게 해 놓고 멀리서 보니까 새끼줄인지 그때는 나이론 줄도 없을 것이고 청어 엮듯이 엮습니다.
  교도소 죄수들 앞에 하나 가면서 전부 엮습니다.
  엮어서 전부 굴로 들어갑니다.
  그때 우리가 생각하기는 살리려고 들어가는지 죽이려고 들어가는지 모르지만 들어가는데 그 뒤에 조금 있으니 따다다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솔자는 누구인가 하면 헌병입니다.
  트럭에 싣고 오는데 4명이 총을 들고 보초를 서는데 그때 여러분들 아실는지 6.25때 7월에 장마가 많이 졌어요.
  전선에도 장마 때문에 폭격을 못 한다고 했어요.
  장마가 많이 졌는데 어떻게 됐는가 하면 2층에서 우리가 보면 우르르 하길래 보면 보여요.
  또 한 대 간다, 그것을 휴식 시간에 거기 나가서 차 올라가는 것을 보면 가마니로 전부 포승줄로 차에 앉혀놓고, 가마니를 가지고 위에 덮습니다.
  코너마다 헌병이 서서 꼭 하루에 적게 가는 것이 여덟 차, 아홉 차, 차 숫자를 헤아려봤어요.
  그렇게 가면 꼭 50분은 사격입니다.
  누구를 죽이는지 몰라도 50분 사격하고 10분간 휴식입니다.
  총소리는 그렇습니다.
  이것이 언제까지인가 하면 한참 바쁠 때는 저녁에 요즘 같으면 7시까지도 총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우리 목격은 그것이고 아까 이야기한 정규반 있고 예비반이 있는데 그날 한번은 CIC가 나와서 그때 누구인가 하면 청방대장이 이부인이라고 그때 청방 소위입니다.
  이 분이 평산지서 근무하다가 평산지서 습격 당하는 바람에 파면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역에 잘 물어보면 아실 것입니다.
  이 분이 청방대장을 하는데 CIC가 나와서 어이! 이 소위! 인원 몇 명 내라고 합니다.
  몇 명하니까, 아무 몇 내라, 그래서 집합해서 자기네들끼리는 알겠지요.
  CIC하고 방위 소위하고 수의해서 정규방위 전부 데리고 갑니다.
  예비방위는 이쪽에 훈련받도록 놔두고 갔다 왔는데 전부 삽을 들고 갔습니다.
  갔다 왔는데 어디 갔다 왔는가 하니까 그때는 뭐 했는가 이야기를 못합니다.
  하면 그것은 그 자리에서 갑니다.
  요즘 이북은 유도 아닙니다.
  그래서 내 친구 김용구라는 사람은 한 마을에 있다가 보니까 내보다 5살 연장인데 거기 뭐하러 갔던가 물으니까 말도마라, 송장 끌어 묻으러 안 갔나!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묻었는가 물으니까 오리나무 밭에 묻었다, 그때 하는 말이 굴이 차단되었다, 벌써 차였다는 말이야, 숫자가.
  오리나무 밭에 갔다 놓고 총살시키고 끌어 묻으러 갔다, 그래서 시체가 어떻던가 물으니까 썩은 것은 썩고 냄새가 나는데 다 못 묻고 어떤 것은 발도 보이고 이래서 대략 끌어 묻어 놓고 왔다고 하는 것이라요.
  절대 이야기하자 마라, 그래서 이것은 내가 들은 것이고, 그 사람이 거짓말 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들은 것이고 그래서 어저께 회장님하고 목격하러 갔는데 그때는 오리나무가 우리 키만큼 했는데 그때 사방한다고 심은 것이 지금은 이것만큼 울창해서 지역을 구별을 못 하겠어요.
  그래서 어저께 한번 갔다 왔다는 말씀을 드리고 그때 그래서 그것이 9월 10일경이나 15일경까지 거기에 CIC가 근무했고 그 장소에 죄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형들이 갇혀 있을 때 저녁에 낮으로는 못 하고 거기에 밀폐돼 있습니다.
  봉창도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청소를 해서 들어가면 뭐가 있는가 하면 드럼통 반 잘라서 거기에 다이를 하나놔서 똥간 하나, 그 여름에 삼베옷, 무명옷 입고 온 사람들이 땀내가 나서 문을 열고 나면 코가 메콤 했습니다.
  안에 밀폐가 되었으니 밖에 누가 높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넋 놓고  한다고요.
  우리는 먹총을 들고 보초를 섰어요.
  밤에 근무를 교대로 하는데 제가 형이 있었기 때문에 동료들한테 담배를 사서 전해주면 오늘 저녁에 11시나 12시에 담배좀 들여줘라, 거기에 30명을 수용했어요.
  그 사람들이 30명을 수용했는데 처음에 7월 10일내지 15일경에 청방이 창설됐는데 그것이 수시로 다섯, 여섯집이 왔다 갔다 했어요.
  나가는 사람 나가고 들어가는 사람 들어오고, 이렇게 했는데 한번은 30명을 싣고 와서 빵구를 내서 갔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수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30명을 수용하면 앉는 것은 앉아있어도 눕지를 못 해요.
  그 만큼 장소가 협소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청방에 있다가 보니까 무엇보다도 그래서 9월 언제 가니까 문이 텅비고 열려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물어볼 수가 있는지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그 뒤에는 거기에 오지 않았고.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7월부터 9월까지 있었다는 말이지요?

○참고인 정영호   예.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어르신네도 어느 날 가니까 그 사람들이 철수하고 없더라는 이야기지요?

○참고인 정영호   예, 그런 사람들은 저녁으로 이동을 하니, 다른 데는 그렇게 안 하는데 여기는 왜 저녁으로 이동을 하는가 하니까 낮으로는 청방에 훈련받으러 오고 이러니까 저녁에 이동했다, 이것은 제 생각이고, 그리고 광산 제일 큰 굴 거기도 어저께 회장님한테도 이야기했지만 아주 우범지대입니다.
  조용한 곳입니다.
  제가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이분들의 행방은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르지요.
  또 CIC한테 물어봐야 가르쳐주지도 않을 것이고 물으면 욕만 얻어먹을 것이고 물어볼 자격도 못 되고요, 그때는 물으면 그러니까, 그래서 된 것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당시에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7월경부터 9월까지 계속 차가 올라왔습니까?

○참고인 정영호   예, 차는 계속 올라왔고 여기에 수용한 인원은 9월 20일경 되니까 끝나고요.
  그리고 지방사람인지 그것은 확실히 우리가 조사를 안 해 봐서 모르겠는데 그래서 그렇게 했고 차는 9월까지 계속 올라왔어요.

○위원장 정교철   7월부터?

○참고인 정영호   예, 하여튼 6.25동란 나고 그때 6월 25이에 여하튼 7월 10일경, 5일경 이 정도부터 계속 올라 왔어요.

○위원장 정교철   차는 지금 같으면 옛날에 일본차 아닙니까?
  닛산 차 아닙니까?

○참고인 정영호   아닙니다.
  군트럭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는 보통 시간을 맞춰서 한 시간에 하나씩 오는 것을 보면 집단된 수용소에서 싣고 오는 것이지요.
  개개인으로 잡아와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렇게 보면 딱 맞는 것입니다.
  이것 한 차 싣고 올 동안 사격이 딱 끝나고 순서가 맞게 돼 있어요.

윤성규 위원   형님하고 대화를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얼굴을 보셨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참고인 정영호   얼굴만 보고 그냥 저것만 봤지, 청소할 때만 다른 창고 가둬 놓고 청소하거든요.
  청소하면 그때는 보지요.
  그때는 형이라도 형입니까, 이 소리 못 합니다.
  그렇게 하면 큰일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면 둘이 볼 때는 형인줄 알지만 그 형이 둘이 있었어요.
  만일 남이 보면 나까지 피해가 오잖아요?
  CIC한테 내가 피해 오잖아요.

윤성규 위원   그 당시에 CIC에 아는 분이 아무도 없었습니까?

○참고인 정영호   그것을 말씀하시는데 CIC에 보조하는 사람이 나는 남방이고 내동에 한 분이 있었어요.
  최정규라는 사람인데 그때 누구말처럼 독립운동가 자손 못된다 듯이 그렇게 되니 재산도 다 탕진되고 사진이고 뭐니 하니까 술 받아줘야지요, 순경오면 이러니 그것 못 할 짓입디다.
  그래서 그분한테 이야기해서 어떻게 되느냐 알아보니까 그분 말은 그분하고 CIC하고 접촉하기가 힘들어 그런지 내 생각에는 돈이 많이 들어서 그런지 그것은 모르겠는데 우리 형편이 그렇고 뭐 별 것 아닐 것입니다, 좋게 될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한 가지 믿은 것이 있었지요.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부희 위원   경찰서 아까 말씀하셨는데 경찰서가 현재 서상동이 아니고 평산동 거기에 경찰서가 있었지요?

○참고인 정영호   아니요, 거기에 지서가 있었어요.

이부희 위원   아까 갇혀 있었다고 해서 하신 말씀, 아까 형님하고 창고에 갇혀 있었다고 하신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참고인 정영호   그 장소가 코발트광산 2층 사무실입니다.

이부희 위원   코발트광산의 사무실 위치가 현재 코발트광산 그 주위는 아니지 않습니까?

○참고인 정영호   어디인가 하면 점촌하고 평산하고 도랑이 있는 경계선 바로 여기입니다.
  왜놈 신사 모셔놓은 데입니다.
  거기가 사무실이 코발트광산 치고는 큰 사무실입니다.

이부희 위원   지금은 집 뜯고 없잖아요?

○참고인 정영호   없습니다.

이부희 위원   거기에 갇혀 있었단 말입니까, 건너편에 거기 있었단 말입니까?

○참고인 정영호   바로 우리 사무실 앞에 창고가 불과 몇 평 안됩니다.
  내가 생각할 때 그때 코발트광산의 비품창고이지 싶어요.

이부희 위원   그 창고에 사람을 갇혀 놓은 것이 몇 명 정도입니까?

○참고인 정영호   한 30명 갇혀 있었습니다.

이부희 위원   그 30명 속에 형님이 포함되었단 말입니까?

○참고인 정영호   예.

윤성규 위원   그러면 그 형님이 집에 나오셨을 때 물론 형님이 안 계셨지만 집에 어른들이 무엇 때문에 거기에 갔다는 말씀을 들었습니까?

○참고인 정영호   무엇 때문에 갔는지 죄목은 모르겠고요, 제가 알기로는 김용구라는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너희 집에 무슨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있나? 같이 청방에 있는 사람인데, 우리 아랫방에 모여 있는데 그때 나는 18살이니까 형들이 있으니까 같이 대화도 못하고 그런 것 아닙니까?
  너는 저 방에 가라는 것을 무슨 일인지 저 방에 갔는데 듣기를 내가 보니까 도장 가지고 왔나, 도장 가지고 오너라 이랬습니다.
  그래서 내 추측에 그때 남로당인가 안 있습니까?
  뭐 가입하는 거요.
  보도연맹입니까?

윤성규 위원   보도연맹은 아니겠지!

○참고인 정영호   그때 남로당이라든가 그럴 것입니다.
  거기에 아마 가입한 것 같아요.
  그래서 자꾸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솔직한 말로 그렇잖아요.
  아까 용성에서 낮으로는 대한민국이고 저녁으로는 인민공화국 하듯이 총 대고 삐라 뿌리라고 하는데 안 뿌릴 사람 누가 있고 심부름하라는데 안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윤성규 위원  


○참고인 정영호   그래서 그때 내가 한 가지 더 알기로는 지방에 사상자들을 모조리 몰살시킨 이유는 6.25때 마포형무소가 죄수들을 갔다놓고 하나도 못 건졌다고 합디다.
  인민군 손에 다 넘어갔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놔뒀다가 어떤 폭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안 되겠다 싶어서 무조건 흠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은 무조건 다 잡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아시면 현명할 것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런데 증언하신 중에서 멀리서나마 형 집행하신 것을 목격하신 것 같아요.

○참고인 정영호   집행을 하는 것은 못 봤지요.

○위원장 정교철   굴로 들어가는, 일어서! 앉아! 하고.

○참고인 정영호  


○위원장 정교철   그것을 보셨지요?

○참고인 정영호   예.

○위원장 정교철   그때 그분들이 웃옷을 입고 있었습니까, 벗었습니까?

○참고인 정영호   입고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왔는지 벗기는 사람도 있고 이런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취조 받다가 벗었는지 그것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고 그때는 더울 때이기 때문에 피는 거데기 덮어씌워 왔고.

○위원장 정교철   차 위에 뭐를 덮었습니까?

○참고인 정영호   호루도 안 덮고 그때는 호루도 귀했습니다.
  그냥 앉혀놓고 소나기 많이 따루니까 거적대기 가마니 길다랗게 짜서 머리위에 덮어놓고 있으니까 그냥 여럿이 병아리 새끼처럼 있으니까 받혀서 있는 것이지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있고 양 코너마다 헌병이 네명 서 있고 그래서 소나기가 뭐같이 따루는데도 계속 올라왔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비오는 날 아주 관찰력이 좋은 것이 무조건 비오면 정식훈련 밑에서 교련을 못하고 위에 2층 사무실에서 군가를 배우기 때문에 더르르륵 하면 2층 사격장에 울린다고요.
  차가 가면.
  그래서 내려다보면 한 대 올라가고 한 대 올라가는 것이라요.

이부희 위원   하나 물어 봅시다.
  현재 여기에 민간학살 한 대상자가 거의가 밖에서 트럭에 싣고 이동해 와서 거기서 보통 이루어졌다고 우리가 알고 있거든요?

○참고인 정영호   무슨 뜻인지 다시 말해 보이소.

이부희 위원   거기에 학살을 하는 대상자가 외부에서 차로 수송해서 올라갔다고 그렇게 알고 있거든요?

○참고인 정영호   예.

이부희 위원   그런데 형님 같은 경우는 거기 지서에 30명이 수용돼 있는 거기라면 외부에서 이동하는 사람하고 여기 있는 사람하고는 아마 아닐 것이 아니냐?

○참고인 정영호   그것은 자세히 모르겠지요.

이부희 위원   이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하루에 몇 대씩 외부에서 수송해서 올라갔는데 형님은 수송대상자가 아니고 거기에 수용돼 있는 대상자란 말입니다.

○참고인 정영호   그러니까 밤에 거기는 가까우니까 밤에.

이부희 위원   죄질이 다르단 말이야, 형님하고 외부에 수송하는 것하고는, 그렇지요?

○참고인 정영호  


이부희 위원   이치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는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거의 다 저기는 어느 지역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길가에 집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요.
  차 몇 대씩 들어가는지 우리 아버지, 할머니 다 살았고.

○참고인 정영호   어디 계십니까?

이부희 위원   평산 비들재입니다.
  거기에 하루에 차가 몇 대씩 올라간 것을 알고 있는데 거기에 학살의 주 대상은 수송했단 말입니다.
  수송인데 아까 증언하시는 분 말씀은 형님이라든지 이 분은 30명이 있을 때는 수송자가 아니고 수용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고인 정영호   서른명 이라는 것은 최고 많을 때가 30명이고 그 다음에 내가 하는 말이 5명씩, 4명씩 저녁에 빠져나가고 다시 보충이 되고 이랬어요.
  몇 일간 그랬는데 한번은 한 트럭이 도착을 했어요.
  죄로 볼 때는 저것은 죄가 적은 사람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는데 그 내막은 모르겠고 이 분은 CIC가 와서 빠꾸를 시키더라고요.
  왜 빠구시키는가 하면 수용인원이 불가피하게 못한다, 장소가 없다, 이래서 갔는데 그것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고요.

이부희 위원   수송하는 일부를 거기에 수용을 했다고 합디까?
  일부는 했는지 안 했는지 아시겠네요?

○참고인 정영호  


이부희 위원   그러니까 오면 수용했다가 현장으로 이동했는가 안 그러면 바로 이동했는가 그것은 알고 계시겠네요?

○참고인 정영호   바로는 이동 안 했지요.
  여기 있은 사람은 모조리 다 갔지요.
  없어요.
  어디를 가도 다 죽은 겁니다.
  내가 볼 때는 굳이 가까운 데 안 갔겠나 이렇게 봅니다.

이부희 위원   우리가 알기로는 수용을 안 하고 차로 싣고 올라가서 한참 있으면 총소리가 났다고 하는데.

○참고인 정영호   그것은 하루 아홉 차씩 했고요, 이 분들 그러면 예를 들어서 하나 물어봅시다.
  가까운데 죽일 장소 놔두고 뭐 하려고 굳이 경비 들여서 멀리 갈 필요가 없을 것 아닙니까?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런 뜻이 아니고 거의가 수송을 했는데 지금 새로운 사실의 증언이 나왔습니다.
  뭔가하면 바로 코발트광산 옆에 CIC가 상주를 하고 있으면서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 경산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데 이 사람들을 거기에 모아서 조사를 해서 사상이 좋은 사람은 내 보냈고 아닌 사람은 바로 형을 아마 집행했는가 그 뜻이 아닙니까?

○참고인 정영호   아닙니다.
  거기서 평산 CIC대 나와서 석방된 사람은 내가 보기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니까 거기에는 대부분이 경산 인근에 있는 사람을 수사를 했든지 안 그러면 경찰에서 어떤 연행을 했다가 CIC로 넘겼다든지 그런 상황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데요.

○참고인 정영호   그렇지도 않아요.
  이것은 내가 볼 때는 형은 직접 붙들어 갔어요.
  이것은 경찰서 거치지도 않고 직접 붙들어와서 그러니까 자기네들 정보는 경찰서라든지 어디서 자문을 받았겠지요.
  받아서 직접 들고 왔어요.

○위원장 정교철   그때 형님이 남방 계셨을 것 아닙니까?

○참고인 정영호   아니지요.



○위원장 정교철   예.

○참고인 정영호   그러니까 나는 불려온 것도 모르고 그 이튿날 가니까 창문으로 보니까 죄수로 갇혀 있다고 해서 보니 형이 왔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내막을 형수한테 내가 물었지요.
  형님이 어떻게 해서 갔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하는 말이 모르겠어요, 밤에 와서 데리고 갔다 하는데 그러니까 데리고 갔는지 요즘은 지서에 가도 가 보면 압니다 하듯이 여기도 그런 것 아닙니까?

○위원장 정교철   그러니까 새로운 사실이 뭔가하면 거기서 CIC가 상주를 하면서 그때 남천 계셨는데 연행돼 왔을 것 아닙니까?

○참고인 정영호   예.

○위원장 정교철   연행돼 왔으니까 경찰뿐만 아니고 CIC도 상당한 숫자를 근거를 해서 거기에 조사를 해서 어떤 처벌을 했네요?
  그것이 증명이 되네요.
  그것 것 아니요?

○참고인 정영호   예.

○위원장 정교철   어떻습니까?
  잠깐 정회 좀 할까요?
  (「예」하는 이 있음)
  그러면 10분간 정회하겠습니다.

(15시03분 회의중지)

(15시18분 계속개의)


○위원장 정교철   의석을 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회의를 속개하겠습니다.
  계속해서 증언을 청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정 선생님 더 하실 말씀 있습니까?

○참고인 정영호   한 가지 빠진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보통 한 차의 인원은 30명 기준입니다.
  왜 제가 정확하게 아는가 하면 개인적으로는 차가 올 때 절대 못 나갑니다.
  평산도로에 다시 말해서 이분께서 평산 계셨다고 하셨으니 잘 알지만 대원골짜기로 올라가는 그 길에 가운데 마을에는 차가 오면 미리 방위가 가서 하루 근무를 서게 돼 있어요.
  왜 근무를 서는가 하면 민간인은 절대로 못 나오도록 하거든요.
  총은 없고 평산에 오리나무가 많으니까 오리나무 작대기로 민간인들 요즘 민방위훈련 하듯이 전부 다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때 방위만 해도 힘 좋았습니다.
  들어가라고 하면 꼼짝 못하고 들어가고 그래서 올라갈 때 헤아려본 것이 보통 GMC에 30명 앉으면 거의 맞습니다.
  꽉 찹니다.
  그래서 인원은 아는 것이고 그리고 한 가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원이라면 그때 잘못한 것이 저녁에 밤 12시쯤 돼서 창고 나무 문인데 부수고 전부 탈옥시켰으면, 탈옥시키고 형도 당신 군대가소, 나도 군에 지원했으면 다 살았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군대가는데 원서니 뭐니 하는 것도 없었고 현역군 따라다니며 우리 집에 못 살아서 그러니 밥좀 주소! 하면 그래! 하며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생각해도 형 보기에 고인된 형 보기에 항상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그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그랬더라면 하는 그 마음입니다.
  이상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예, 수고했습니다.
  다음에는 이태준 씨!

○참고인 이태준   저희 고향은 경북 경산시 용성면 외촌리 1148번지이며, 현재는 대구시 수성구 중동 118-12번지에 살고 있으며 당 65세입니다.
  1950면 6.25전쟁이 나던 해에 저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으며, 13살이었습니다.
  1950년 6.25전쟁 나기 1년전 정도가 될 것입니다.
  밤에 빨갱이가 마을에 와서 집집을 돌아다니면서 밥과 심부름을 시키고 말 안 들으면 즉석에서 죽인다고 했기 때문에 겁이 나서 밥도 해 주고 심부름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멀리 지서에 가서 신고를 하면 순사들이 그 당시에는 보면 지서에 3명 내지 4명 정도 있은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빨갱이한테 겁이 나서 맞아죽을까 싶어서 다시 오지를 않고 빨갱이가 간 후에 마을에 와서, 낮에 마을에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들판 같은 곳에 집합시켜놓고 그대로 금수와 같이 몽둥이로 막 패서 그 당시에 골병든 사람도 상당히 많습니다.
  옆에 계시는 누님은 고향에 한 마을에 살았습니다.

윤성규 위원   잠깐만요! 그러면 금수같이 취급해서 때리는 사람이 지서직원이라는 말입니까?

○참고인 이태준   그렇지!

윤성규 위원   경찰관이겠네요?

○참고인 이태준   그렇지!
  그저 한 두어명 와서 마을에 집합시켜서, 그때는 제가 알기로는 7살, 10살 이쪽 저쪽하는 것은 마을을 비우고 다 집합했습니다.
  여기 누님도 같이 했습니다.

윤성규 위원   동네 사람이 그 전날 저녁이라든가 저쪽에 소위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한테 협조를 안 해도 했는지 안 했는지 구분도 없이 무조건 집합시킨다는 말입니까?

○참고인 이태준   그렇지!
  겨울에도 있고 그러니까 그런 것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윤성규 위원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6.25전이라는 말씀이지요?

○참고인 이태준   전이지!

윤성규 위원   그러면 ’49년도?

○참고인 이태준   그 정도 될 것이라.
  눈 왔는 해는 겨울이라.
  그래서 그러고 있는 중에 밥해 준 것, 심부름이라면 그 당시에 짐 날라주고 죽인다고 하면서 삐라도 뿌리고 여기에 다 비슷할 것입니다.
  한번 뿌리고 이러면 그것을 큰 죄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윤성규 위원   그때 외촌 같으면 금박산 쪽에서 내려온.

○참고인 이태준   그렇지! 금박산, 그 다음에 영천쪽, 그래서 보도연맹만 가입하면 과거에 밥해 주고 심부름 해 준 그런 것을 다 없애 준다고 한 것이라.
  그래서 거의 다 보도연맹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윤성규 위원   그렇다면 아까 말씀하실 때는 한 동네 사람 무조건 들에 집합시켜 놓고 금수같이 취급을 하면서 때리고 했다, 그 당시에는 지서장이 누구였습니까?

○참고인 이태준   그 당시에도 아마 박만수 였을 겁니다.
  그래도 맞지, 왜 그런가 하면 지서장이 무조건 때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잖아?
  무조건 사람들을.

윤성규 위원  

  (「그래서 국회의원 됐잖아!」하는 이 있음)
  말이 조금 이율배반적인 그런 문제가 있는데?

○참고인 이태준   그런데 지서장이 마을 사람들을 무조건 패라, 그런 것은 아니잖아?
  가서 저것을 했으니까 지서장 밑에 있는 사람들이 결론적으로 마을에 와서 두 서너명이 와서 누님은 더 잘 알거라.
  그래서 와서 패고 이러니까 지서장이 직접 참석은 안 했지.
  요원들이, 그 당시 제가 알기로는 순사.

이부희 위원   이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시고 그것은 있다가 할 때 하시고 현재 하시는 것하고 끝나고 그 다음에 하고 실명 거론하는 것은 앞으로 있거든 다음 정회시간에 끝나고 난 다음에, 물어보고 하세요.
  왜 그런가 하면 이것이 전부 녹화가 되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진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참고인 이태준   예.

윤성규 위원   우리가 거기까지, 동네 사람들을 나오라고 해서 집합시켜놓고 그런 학대를 했다?

○참고인 이태준   그렇지, 학대를 했지!
  지금도 고향에 가면 사시는 분들한테 물어보면 충분히 다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때 그 당시에 우리 종형님은 옛날 소학교, 요즘 초등학교도 앞뒷문도 모르고 순수한 빈농의 오지 마을의 농사꾼으로 그때 글 이야기하면 야야! 너는 발바닥이다 해서 낫 놓고 “■"자도 모르는 아주 문맹인이었습니다.
  그래서 6.25전쟁이 난 후에 보도연맹에 가입을 했기 때문에 1개월 정도 내가 생각했을 때는 지났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 고향은 잘 아시다시피 영천시하고 경산시하고 경계지역인데 그 당시에 영천 춘안들, 신령 등지에서 인민군이 제가 생각할 때는 왔는 것 같습니다.
  포 소리가 나고 저녁에는 벌겋게 떨어지는 그런 정도가 됐을 때 그럴 무렵에 동사무소에서 CIC인가 여하튼 그런 사람들이 두어 사람 정도 온 것 같아요.
  그래서 와서 마을의 동정을 살피고 이래서 용성지서에 가서 외촌동에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전부다 출두시켜라 그렇게 하니까 마을사람들은 지서라고 하면 그때는 겁이 많아서 겁도 나고 하니까 무조건 오라고 하면 지진해서, 우리 고향사람들은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니까 지서 앞에 소방창고가 옛날에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있었는데 거기서 이틀간 정도 있다가 그 다음에 경산경찰서로 가서 거기서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 일간 조사를 받고 거기서 몇 일간 머물다가 경산농수리창고가 있었답니다.
  지금 담배창고도 있었고 담배수납창고도 있었고 농수리조합 창고도 있었는데 우리 마을사람들은 전부 농수리조합 창고에서 거기서 수일간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우리 백부님도 간식도 몇 번 가져다 주고 이러다가 어느 날 가보니까 어디로 갔는지 소식이 끊어지고 나중에 보니까 그때는 우리 고향에서는 들미광산이라고 했습니다.
  그쪽으로 다 싣고 갔단다, 그런 말이 있고는 영 확인할 길은 영원히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를 들면 거기에 같이 살아계시던 분이 현재 78세인데 마을에 지금 살고 계십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당시에 농수리창고에 있을 때 미군 한 사람하고 그 다음에 한국인, 그러니까 통역관이겠지요.
  와서 무슨 말을 하더니 당신네들은 살려 줄테니 그렇게 알아라, 멀지않아서 살려준다, 그렇게 하고 갔는데 그리고 난 후에 몇 일 후에 고향에 한 분이 같이 있었던 분의 동생이 떡하고 담배를 갖다 줬는데 감독관이 모르는 사이에 떡이랑 갈라먹고 담배를 피웠답니다.
  그러니까 봉창도 제대로 없는데다 담배를 피웠으니 연기가 자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감독관이 와서 대번에 다 죽인다고 그러고 혼줄이 났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까 약 30명 정도를 이름을 불러서 나갔는데 그때는 살아 계신 이 분의 증언에 의하면 고향에 집으로 갔는 줄 알았는데 자기가 20일인가 후에 고향에 와 보니까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중에 그 분들도 같이 아마 들미광산으로 갔지 않았느냐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첨언한다면 그 당시에 조그마한 기관에 어떤 분들이라도 알면 소 한 마리 팔아서 주면 이렇게 하고 옳게 용하게 줄을 서면 살아 나왔다고 합니다.
  이 분도 우리 종형하고 같이 저희들도 소를 그때 제가 알기로는 그 당시에 소도 먹이고 다녔기 때문에 뿔이 꼬부랑한 황소를 한 마리 팔았습니다.
  팔아서 살아온 이 분이 집이 한데 붙었습니다.
  그래서 갔는데 그 당시에 이 사람이 최태암인데 최태암이 누구를 아느냐, 소방대장 누구를 아느냐, 멋도 모르고 예, 압니다 그랬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형님은 이 아무개 이 사람을 아느냐, 생전에 농사만 짓고 어디 장에도 내려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모릅니다 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다는 이 분은 살았고 모른다는 종형은 결론적으로 그냥 같이 나오지를 못하고 이분은 아마 30여명 먼저 간 틈에 끼었습니다.
  결국 경산광산으로 갔다는 이야기이고, 지금 증언을 하실 분은 그 분이 연세가 많은데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윤성규 위원   누구십니까?

○참고인 이태준  

  그리고 그 당시에도 첨언하자면 군대를 갔다던가 그 당시 6.25사변 나고 난 뒤에 군대를 갔으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 해결이 됐는데 우리 종형은 그때 막 결혼을 해서 신혼 중이었습니다.
  결혼한지 1년도 안 됐습니다.
  일찍이 결혼을 했는데 그러니까 군대도 안 가고 이렇게 쳐지는 바람에 그 당시에 고향분들은 군대를 가신 분들은 거의 다 지금도 군대갔다 무사히 살아오신  분도 있고 전사하신 분도 있고 이런데 형편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이상으로 제 증언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물어보실 것이 있으면 물어 보세요.

윤성규 위원   중형되시는 분이 창고에 수용돼 있다가 소위 호명이 돼서 차출이 돼서 나갔는데 어디 갔는지는 모른다는 이야기지요?

○참고인 이태준   그렇지!
  그래서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경산 들미광산 쪽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도 대략은 이 분이 들었는가 모르지만 증언하시는 분이 그 분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외부에서도 그 당시에 밤낮주야로 점하러 다니면서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남으로 갔다, 그때 점을 참 많이 했습니다.
  솔직한 말로.
  송아지 한 마리 팔 정도로 점은 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밤낮주야로 온데 다니면서 하면 남쪽으로 갔다, 어떤 사람은 동서간으로 갔다, 서쪽으로 갔다 이렇게 했는데 그러니까 온 소문이 계속 다니면서 안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니 그 당시에 대략 들미광산으로 본 사람들이 많다, 그때는 들미광산이라고, 저는 코발트 광산 이야기는 3년 전에 일이 생기고 난 뒤에 처음 코발트광산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윤성규 위원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는.

○참고인 이태준   그렇지!

윤성규 위원   최태암 씨도 같이?

○참고인 이태준   그렇지!
  우리 마을에는 다섯 분이 늦게까지 있었는데 세 분은 결론적으로 가시고 두 분은 살아 나왔는데 한 분은 고인이 됐습니다.
  최태암 씨는 현재 살아 계시고 그렇습니다.
  뭐라도 물어볼 것이 있으면 물어 보세요.

김인규 위원  


○위원장 정교철   예, 다음에는 윤술남 여사님!

○참고인 윤술남   저는 결혼을 너무 일찍 했거든요.

○위원장 정교철   연세가 지금 어떻게 됩니까?

○참고인 윤술남   집에 나이로 73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당시에 주소는요?

○참고인 윤술남   경산시 하양읍 환상3동 510번지.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망인되신 분은 누구신데요?

○참고인 윤술남   우리 남편인데요.

○위원장 정교철   성함은요?

○참고인 윤술남   실을 재자, 으뜸 원자, 정나라 정자 그렇습니다.
  정재원.

○위원장 정교철   그 당시 연세는 얼마쯤 됐습니까?

○참고인 윤술남   저하고 네 살 차이니까 18살에 결혼하고 22살에 결혼해서 제가 20세 돼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24세정도 되겠지요.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당시에 직업은 갖고 계셨습니까?

○참고인 윤술남   직업은 학생으로 서울가서 공부하다가 아버지께서 장질부사 걸려서 사경에 있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내려와서 병구완하는데 협조하고 회춘을 못 하시고 돌아가시고요, 그래서 우리 시어머니가 아들 하나를 가지고 안상주 있게 한다고 부랴부랴 결혼을 시킨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어머니는 외아들에 딸이 다섯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당시에 학생이었는데 그러면 대학교에 다녔겠네요?

○참고인 윤술남   대학교도 아니고요, 진량에서 중학교를 했는지 어디서 했는지 하고 서울에 옛날에 일본사람들 다니는 학교에 다닌 것 같아요.

윤성규 위원   그러면 하양에서 연행이 됐습니까?

○참고인 윤술남   그런데 저는 가정 내용이고 내가 오기 전 사실은 잘 모르지 않습니까?
  나이도 어리고 아무 것도 모르니까 내가 결혼해서 오니까 과수원도 있고 논밭고 있고 큰 일꾼을 들여서 일을 하면서 남의 식구들을 많이 불러서 거들어 가면서 일한 농가집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가족 속에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시엄마하고 오빠, 올케 언니들 속에서 학교 가려고 하니까 기집애들은 학교가면 못쓴다고 학교를 늦게 들였어요.
  늦게 들여서 졸업하고 17살 6월달에 졸업하고 18살 10월달에 결혼을 해서 음력으로 12월 16일날 신행에 갔거든요.
  그래서 2월 초삼일날 시아버님 소상 모셔놓고 첫 친정 가서 또 10월이 돼서 시가로 왔거든요.
  그러니까 시집 사는 기간이 얼마 안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집안에서 빨갱이 짓을 많이 한 사람이 있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방위대들도 동네 덮치고 이러는데 이 양반은 서울서 와서 우리 시아버님께서 다 맡아서 살림을 사시다가 우리 시어머니도 아무 것도 몰라요.
  그런데도 서당글을 읽으시고 선비 어른이신데 문중 대표 일을 맡아서 할 정도로 훌륭하신 분이고요,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니까 농사는 많고 하니까 집안 일이 엉망이 아닙니까?
  그래서 일꾼들을 데리고 하려니까 저 양반도 일을 못하지, 나도 열일곱까지 배우다가 열여덟에 오니까 아무 것도 못하고 그런데 우리 시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내 화풀이를 딸하고 며느리하고 아들한테 다 하려고 해요.
  일이 안 되니까.
  그래서 두서도 못 차리고 지내니까 과수원에는 저녁으로 도둑 맞을까봐 지키러 나가요.
  시어머니하고 우리 주인양반하고 지키러 나가고 시누이 하나 시집가고 넷하고 저하고 집에서 넓은 집 지켜가면서 이렇게 지내는데 제가 생각할 때는 절대적으로 그렇게 하는 동기도 안 보이고 그렇게 할 마음의 여유도 없고 그런데 그때 가는 날을 음력으로 6월 초삼일날.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몇 년도입니까?

○참고인 윤술남   그것이 조금 지나고 나니까 영천사건이 나서 우리 집에 피난민들이 많이 들어 있었거든요.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6.25 후입니까?
  영천 사건 이후 같으면 6.25후다, 그렇지요?

○참고인 윤술남   아니, 가고 없을 때 영천사건에서 피난민들이 우리 아래채에 많이 와서 밥 끓여먹고 했어요.
  그런데 방위대에서 무슨 일이 있다면서 능금밭에 막 내려서, 꼬마가 하나 그때 시집가니까 7살이었어요.
  그런데 오빠가 사랑스럽다고 내 데리고 다녔는데 점아! 잘 보고 있거라, 내가 볼일보고 곧 올게다 하면서 갔다고 해요.
  들에 갔다 오니까요.
  그런데 오지도 않고 왜 이렇게 안 오는가 했더니 하양지서 마을에 네 사람이 같이 갇혔다고 해요.
  그래서 왜 갇혔는지 생각을 다 하고 있었는데 그러면 하루 이틀 지나도 나오지도 않고 저녁에 감나무에 달이 환하면 세 사람 엄마들이 노인들이, 할매들이 셋이 와서 우리 시어머니하고 같이 이야기를 해요.
  걱정만 하고 가고, 걱정만 하고 가고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일하는 사람도 없고 죄지은 것도 안 보이고 이를 어쩌나 싶어서 우리 큰집 시숙이 읍사무소 회계보고 계셨다고 하면서 궁금하신 분이 우리 사촌 시숙이었어요.
  그래서 우리 시어머니한테 큰집 아주버님한테 가서 일을 봐 달라고 하세요, 그렇게 부탁을 했지요.
  우리 시어머니가 모르고 계시니까 깨친다고, 그랬더니 내가 그 놈의 손한테 가서 사정해야 되나 하면서 우애가 없었는가 봐요.
  그래서 사정해야 되나 하면서 이러면서 안 가셔요.
  그러니 네 할매가 모여서 무슨 일을 합니까?
  저는 그때 시집가니까 아무 것도 모르지, 과정이 어떻든지 하양이 어디에 붙었는지, 경산이 어디에 붙었는지 이것도 모르고 집안에만 있으니 가려고 한들 차비도 없고 밥 먹고 꾸물대다가 이런 상태였는데 그렇게 20일 가까이 됐는가봐요.
  오늘 하양지서에서 경산경찰서로 넘어 갔단다, 해요.
  그런데 우리 외가집이 경산 중방동에 살았어요.
  살았는데 외할아버지하고 외종조부님하고는 용성 외촌에 사시다가 다시 고향에 가서 사시는데 경산에 갔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 외가집이 거기 있으니 내가 한번 뛰어가봐야 되겠다, 하고 차를 타고 갔어요.
  외가집에 가서 하양지서에서 20일 있다가 오늘 경산경찰서로 왔다고 해서 왔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 외 5촌하고 몇이 모여서 있는데 그때 우리 종조부님이 중방동 동장을 맡아서 있었어요.
  동사무소 일을 보고 계시는데 지금은 업무시간이 아니니까 내일 아침에 일찍 알아보자고 하시더니 자고 아침에 갔다가 오셔요.
  오시더니 5촌들하고 몇몇 사람들이 모이데요.
  걱정스러운 일이 있으니까 모이는데 방에 들어가시니까 모두 따라가요.
  나는 정황없이 앉아 있으니까 죄없는 사람들은 조요로 보낸단다, 이렇게 말씀을 하셔요.
  그러더니 종조부님이 너희 집안에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없나, 지서에서 일주일만에 경찰서로 넘기는데 20일 가두어 놓는다는 것은 죄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데요.
  그래서 시어머니하고 무식하게 집안 우애도 없이 지내니까 참 억울하게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나는 비관에 잠겨서 혼자 있으니까 방에서 모두 이야기를 하고 나오는데 모두 눈이 벌겋게 해서 우는 상태로 해서 나와요.
  그때 방에서 나올 때.
  그래서 내 생각에는 경찰서 가 놓으니까 좋은 말이 안 나왔는가 보다, 왜 저렇게 모두 눈이 벌겋게 울고 나오나 싶더라고요.
  그렇지만 내 마음으로서는 아무 죄도 없는데 죽일 리가 있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죽는다는 것은 이 만큼도 생각을 안 했어요.
  그래서 집에 와서 그 이후에는 외손이 하나 대구에 형사로 있는데 그래서 경산에서 행방불명이 됐으니까 알아봐 달라고 하면서 대구형무소에 가서 정재원이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고 다 조사를 해 봐도 없더래요.
  그래서 대구시내는 다 없으니까 더 알아볼 일도 없고 조요로 보낸다고 하니까 조요로 보내면 옷을 찾아가라고 할 것이다, 이제 생각해 보니까 그 말은 내가 진정하라고 이야기한 것 같아요.
  그런데 계산을 대 보니까 음력으로 6월 초삼일에 하양지서에서 20일간 있었으면 23일에 경산에서 일주일만에 나갔다고 볼 것 같으면 6월 그뭄, 아니면 7월 초하루날 정도 안 되겠나, 가다가 죽었다고 생각을 하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모두 군에가서도 전사받은 사람, 빈소 차려놓고 모시다가도 돌아오는 사람도 있고 하는데 가족들이 있다면서 이것을 어떻게 되나 하고 그저 산 사람 밥처럼 밥만 한 그릇씩 뚜껑 덮어서 두고 계속 이렇게 있었어요.
  그래서 하루 이틀 가도 소식도 없고 아까 회장님 말씀처럼 점하면 봄에 하면 가을에 온다하고 가을에 하면 봄에 온다고 하고 계속 그렇게 하고 우리 시어머니는 오도록 쌀 퍼주고 점바치 불러서 푸닥거리하고 이러는데 어른이 하시니까 뒷모도 한다고 따라다니고 그래서 농사가 엉망진창이 되었어요.
  딸들도 큰 사람 시집보내고 제가 시집보내고 내 밑에 하나 있지 나도 밥하고 하는 것도 못 견디는데 들일 못 하지요, 그래서 우리 시어머니가 맡아서 하니 나락은 베서 눕혀 놓으면 물에 둥둥 떠내려가서 다 버리고 보릿대는 보리베서 물에 담겨져 있으면 거둬내라고 하면 딸들하고 다 가면 치마가 물에 잠기고 하는데 물에 젖어있는 것을 도로가에 꺼내 놓으면 이것은 다시 꺼내자, 이것은 밭에 갈아서 다 부서지고 쓸어 내리고 나면 짚만 끄집고 가요.
  그래서 제가 어른들한테 그랬어요.
  어머니요, 이런 농사지으려면 골탕만 들고 먹고 사려고 하는 것인지 죽으려고 하는 것인지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도로가에 내 버린 것 품 주고 사람 데려서 두드려서 발라먹으면 안 되겠느냐.

○위원장 정교철   예, 알겠습니다.
  그러한 딱한 심정은 알겠고요, 그렇다면 음력 6월 3일날 하양지서에서 약 20일간 있다가 경산경찰서로 넘어와서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 조사를 해 본 사실이 있습니까?

○참고인 윤술남   우리 종조부님이 알아보고 난 뒤에는 우는 모습만 보고, 그 이후에는 대구 형무소에 형사.

○위원장 정교철   거기에 확인해 보니 없고?

○참고인 윤술남   없고요.

○위원장 정교철   그 다음에는요?

○참고인 윤술남   그 다음에는 알 길이 없고, 죄가 있어야 죽지, 죄가 없으니까 어디라도 가서 오겠지 하고 살림살이만 열심히 살았지요.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살다가 보니까 오랫동안 안 오고 우리 시어머니도 능금밭에 약을 치려고 해도 저울도 달 줄 알고 이래야 되는데 그런 것을 모르니까 우리 시삼촌이 오시더니, 질부야! 질부는 눈이 밝으니까 형수 맡겨놨다가는 살림이 절단나겠다, 질부 살림 아니가, 질부가 맡아서 살아라.
  청천에 과수원 밭에 가면 약을 타서 일꾼 물 갖고 가라고 하면서 이렇게 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해요.
  그래서 과물조합에 월보보고 이번 달에 어떻게 약을 하면 된다는 그것을 호롱불 밑에서 저녁에 그것을 읽어보고 그 다음에 농약방에 가서 물어보고 농사짓는 사람한테 물어보고 그래서 제가 맡아서 살았어요.
  그렇게 사니까 어른이 다니며 애 먹고 하다가 놉을 들여서 하니까 일이 돼 나가니 어른은 제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지요.
  아들같이 생각하고 그렇게 사니까 우리 큰집 시숙이 조카를 안 맡기고 아들도 딸도 없는 며느리한테 맡긴다고 하면서 우리 시어머니를 괴롭혀요.

○위원장 정교철   그래서 그 이후에는 알아봐도 전혀 몰라요?

○참고인 윤술남   아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고요, 그래서 양자를 한다는 문제가 나왔어요.

○위원장 정교철   그것은 오늘 우리 증언을 받는 그러한 상황하고 조금 떨어집니다.
  그러면 전혀 아무런 이유도 없이 6.25 직후입니까?
  6.25나던 그 해에 갔다, 그렇지요?

○참고인 윤술남   영천사건 나고 피난민들이 집에 들어서고 하니까.

○위원장 정교철   6.25 나고 난 뒤에 한참 영천으로 내려올 때 그때네요?

○참고인 윤술남   예, 영천에 내려올 때 집에 없었거든요.

○위원장 정교철   그래서 사망신고는 언제 했습니까?

○참고인 윤술남   사망신고는 양자하고 호주상속 받고 그러할 때 우리 큰집 시숙이 했는가봐요.

○위원장 정교철   더 이상 증언할 것이 있습니까?
  더 이상 말씀하실 것이 있습니까?

○참고인 윤술남  


○위원장 정교철  


○참고인 윤술남   그러자 지금 50년이 지난 후에 코발트 광산에 3,500명이 묻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저는 혼이 다 달아나고 넋이 다 떳습니다.
  어떻게하면 저 물구덩에 흙구덩에 굴 속에 저기에 가 있을까?
  내 팔자가 왜 이렇나 싶어 신경을 써서 요즘 병원에 치료하러 다닙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는 보면 모두 지방에 국회의원들이 힘을 써서 다 좋은 자리로 옮겨주고 하는데 우리 회장님 여기 있지만 다달이 회의하러 가면 유족끼리 모여서 이렇게 하고 이래서 시청에서 우리 시장님하고 나서서 중앙에 이러한 사실이 맞다고 진정서를 올려서 일을 하면 힘이 될 것인데 우리 경산유족들은 너무 약하게 보이니까.

○위원장 정교철   아닙니다.



○참고인 윤술남   이 일이 안 되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시장님 이하 의원님들이 이렇게 협조해 주시니까 앞으로 좋은 일이 안 닥쳐오겠나 싶습니다.
  그 전에 우리 오빠하고 아버지하고 일을 하시는 것을 보면 항상 경찰서장, 면장, 군수 진정서 받아 올리니까 다 되더라고요.

김인규 위원   우리도 이것을 유족회 여러분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까 싶어서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윤술남 여사님 바깥 분께서는 전혀 아무 죄도 없다고 하시는데 무슨 그 이후로는 무엇 때문에 잡혀갔다는 그 이유는 전혀 모릅니까?

○참고인 윤술남   아까 내가 말한 그것이고요 어디와서 끄집고 붙잡고 데리고 간 것도 아니고 간 뒤에 자기 소지품 가방을 뒤벼보니까 청년단장증이 있더라고요.
  공부할 때 전보쳐서 돈 부쳐달라니, 잘 받았다는 그런 편지하고 모아 놨는데 보니까 청년단장증이 있었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청년단장 소속이 어디입니까?
  경산시 청년단장이냐, 서울에 청년단장인지 기억이 안 납니까?

○참고인 윤술남   환상동에 있으니 환상동이겠지요.

김인규 위원   그러면 같이 가신 분들은 한 분도 나오신 분이 없습니까?

○참고인 윤술남   네 사람이 똑같이 가고.

김인규 위원   그때 행방불명 돼서 그 길로 네 분다 그렇습니까?

○참고인 윤술남   예, 네 분이 똑같이 없어졌어요.

○위원장 정교철   그분들이 역시 한 동네에 사신 분들입니까?

○참고인 윤술남   예, 모두 정가인데 가까운 집안은 아니고 그저 일가라요.

○위원장 정교철   전부 정 씨들이고 네 분 다 완전히 지금까지 똑같은 상황입니까?

윤성규 위원   지금 부양은 누구한테, 양자한테 받고 있습니까?

○참고인 윤술남   그런데 제가 조카를 받아서 호적에 올리니까 내 아들이 됐으니 엄마할 도리를 다 해야지 싶어서 중학교 밖에 안 했는데 내가 고모들 고등까지 시킨 실력이 있으니까 너도 대학교까지 시켜줄 테니 그래서 네 앞 닦겠나, 공부를 하라고 했어요.
  그러니 나는 글이 사주에 없는지 책만 들만 잠이 오고 책만 놓으면 눈이 말똥말똥하다면서 안 하고 사업을 해서 실패를 자꾸 하고 했는데 제가 능금밭 팔아서 떠밀어 줬어요.
  그랬더니 그 이후에 까먹은 재산 다 건지고 아들 손자 셋 나아서 대학교 다 하고 지금 저거는 행복하게 살게 돼 있습니다.

김인규 위원   축하합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런데 자식은 하나도 안 낳았습니까?

○참고인 윤술남   예.

○위원장 정교철   참 안 됐습니다.

○참고인 윤술남   그런데 위원장님! 열심히 보살펴서 제 가슴에 맺힌 한을 좀 풀어주세요.

이부희 위원   이야기를 들으면 여리고, 다 들어보면 사연이 다 있고 들어보면 마음 아픈 일이 많습니다.
  마음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조사는 조사거든요.
  아픈 이야기는 우리 살아가면서 묻어야 할 것도 있고 나타내야 할 말도 안 있겠습니까마는 오늘 여기에 대해서 한 가지만 우선 물어보겠습니다.
  아까 네 사람하고 처음에 말씀하실 때 나가서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씀을 하시다가 끝에 가서 정씨들하고 같이 네 사람이 같이 없어졌다, 이렇게 정반대적인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참고인 윤술남   그것은 내가 자꾸 정신이 헷갈리고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몰라도 네 사람이 하양지서에 갇혀서 할매들 넷이서 밥을 싸다가 갖다 날랐어요.

이부희 위원   네 사람이 같이 해서 하양지서까지는 갔다 그렇지요?
  그냥 집나간 것이 아니고.

○참고인 윤술남   하양지서에 가서 거기서 밥을 해서 갖다 나르다가 20일 넘게 돼서 경산경찰서로 넘어갔어요.

이부희 위원   그러면 경산까지 간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요?

○참고인 윤술남   예.

이부희 위원   그러면 경산경찰서에서 어디 갔는지는 모른다?

○참고인 윤술남   예, 그래서 우리 종조부님이 저녁에 업무시간이 아니니까 아침에 가서 알아보고 했으니까 거기까지 간 것은 확실하지요.

이부희 위원   예, 그러면 잘 알겠습니다.
  경찰서에 갔는데 코발트까지 갔는지 거기까지는 모르지만 네 사람이 경산경찰서까지 간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요?

○참고인 윤술남   그런데 거기서 엿새 아니면 일주일만에 거기서 나갔어요.

이부희 위원   어디로 나갔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는 없지요?

○참고인 윤술남   그것은 모르지요.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사동에 우리 외사촌 올케가 있거든요.
  그리고 사동에 아가씨를 우리 며느리로 봤고 그런데 거기에 도랑에 핏물이 줄줄 흐르는데 6월 그뭄부터 7월달까지 많이 실어서 거기에 때려 넣었다고 그렇게 하데요.

이부희 위원   예, 잘 알겠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다른 질의 있습니까?
  (「없습니다」하는 위원 있음)
  그러면 다음에 이금순 여사님 증언하십시오.

○참고인 이금순   저는 청도 금천면 김전2리에 삽니다.
  이름은 이금순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참고인 이금순   지금 우리 나이로 74세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 당시의 주소는요?

○참고인 이금순   그 당시의 주소가 김전2리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돌아가신 분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참고인 이금순   남편됩니다.

○위원장 정교철   성함은요?

○참고인 이금순   박희도입니다.
  이름을 그때 박희도라고도 부르고 박희웅이라고 부르는데 어느 이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호적상에는 박희도라고 돼 있을 겁니다.
  그때는 저도 나이 어려서 출가해서 우리는 딸도 아들도 3대 외동입니다.
  내가 외동으로 시집가서 촌에서 학교는 김전국민학교하고, 그런데 해 준 것이라고는 죄목은 산에 빨갱이들 밤으로 내려와서 밤으로 잠 못 잤습니다.
  낮에는 지서에서 와서 그러지요, 밤에는 산에서 내려와서 그러지요.
  이래서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고, 산에서 내려와서 밥 해 다오, 떡 해 다오, 해 달라고 하면 안 해 주면 그 자리에서 죽인다고 하고 집에 불 싸지르고 현장에 불도 싸지르고 이렇게 하니까 동네에서 그때는 구장이라고 하지요.
  구장이 반장한테 쌀을 거둬라, 동네에 거둬서 그때는 방앗간도 없고 집에 디딜방아로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담궈서 빠서 백설기를 쪄서 산에 사람들을 줬거든요.
  주고 나니까 낮에는 지서에서 와서 그러지, 하는 죄목은 그것인데 그래서 나중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그것도 재미가 없고 이렇다고 하면서 우리 시어른이 아들 3대독자 하나를 우리 시어른이 보도연맹에 가입을 했는가봐요.
  나중에 듣고 보니.
  그래서 들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을 순경이 와서 데리고 갔습니다.
  나중에 들으니까 청도 서로 넘어 갔는가봐요.
  그때 나는 남편에 대해서는 어른이 계시니까 말도 한 마디 못해보고 이런데 시어른이.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때 간 시기가 언제쯤으로 기억이 납니까?

○참고인 이금순   그것이 5월 스무엿새날 들에 일하다가 들어갔습니다.

김인규 위원   음력이지요?

○참고인 이금순   그때는 다 음력이지요.

○위원장 정교철   6.25전입니까?

○참고인 이금순   바로 즉시되지요.

○위원장 정교철  


○참고인 이금순   우리 아들이 그때 유복자가 53살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당시에 바깥어른의 연세가 얼마쯤 됐습니까?

○참고인 이금순   26살입니다.
  나는 22살이고 바깥주인이 4살 더 먹었느니 26살.

○위원장 정교철   직업은 농사짓고요?

○참고인 이금순   예, 농사지었습니다.
  그래서 가고 2주는 됐을 것입니다.
  그때는 재를 넘어서 차도 없고 걸어서 가고 우리 시어른이 신양이 있어서 잘 출입도 못 하시는 어른인데 3대독자 아들이 그렇게 됐으니 청도 서로 갔었습니다.
  가니까 그날 전부 트럭에 싣고 다 싣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윤성규 위원   시어른이 몇 일정도 집에 계시다가 청도에 갔습니까?

○참고인 이금순   2주돼서 갔으니까 그날 전부 다 싣고, 김전에서 걸어서 거기까지 갔으니 낮때쯤 안 됐겠습니까?
  가시니까 직전에 전부 트럭에 싣고 갔다고, 그 때는 우리 시어른이 우리 3대 독자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9년을 출입을 못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소문을 들으니 나는 광산만 소리를 들었지 광산으로 다 싣고 갔다 이렇게 됐습니다.
  그 후로는 알아보려고 해도 알아 볼 수도 없고 시어른 9년 병환으로 계시고 그래서 이때까지 이렇게 지낸 것입니다.

윤성규 위원  


○참고인 이금순   아니 우리 시어른이 면회를 가니까.

윤성규 위원   면회를 가니까 트럭에 싣고 광산으로 갔다고 하던가요?

○참고인 이금순   예.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당시에 동네에 혼자만 갔는가요, 안 그러면 몇 사람 같이 갔는가요?

○참고인 이금순   우리 동네에는 애들 아버지 혼자 갔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 후에는요?

○참고인 이금순   그 후에 붙들려 간 사람은 다 나왔어요.
  열흘 후에 그렇게 간 사람은 다 왔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어른 혼자만 그렇게 됐네요?

○참고인 이금순   혼자만 아니지요.



김인규 위원   거기도 보도연맹에 가입된 분입니까?

○참고인 이금순   가입도 안 하고 집에 있는데 영천가서 나중에 보면 알지만 그때 너 댓 살 먹었으니 잘 몰라요.

○위원장 정교철   그런데 시어른이 보도연맹에 가입했고.

○참고인 이금순   아니요, 시어른이 아니고 우리 아들을 시어른이 가입을 시켰어요.

○위원장 정교철   본인은 모르는데 시어른이 가입을 시켰다는 말입니까?

○참고인 이금순   예, 떡 해주고 이러니 죄를 없애준다고 하니까 시어른이 살리려고 어떻게든지 살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것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그 후에 행방을 조사 해 봤습니까?

○참고인 이금순   조사를 누가 합니까?
  시어른 병환에 계시고 출입도 못하고 병환으로 계시고 나는 22살 때 그때 여자는 원래 삽작 밖으로, 동구 밖도 못 나가게 하고 이러니까 모르지요.
  3대독자 외동아들 하나인데, 9년을 병환으로 계셨습니다.

김인규 위원   지금도 김전에 계십니까?

○참고인 이금순   그리고 나서 내가 아들을 데리고 안 시어른을 모시고 살다가 우리 딸은 거기서 출가를 시키고 우리 아들이 열 댓살 넘게 먹으니 거기 안 사려고 해요.
  그래서 그 애가 나가는 바람에 나도 따라 객지에 나갔다가 33년만에 고향에 들어왔습니다.
  아들은 서울에 있고.

○위원장 정교철   그래도 고향이 그리워서 다시 오셨네요?

○참고인 이금순   안 그래도 거기 사람들 그럽니다.
  이 골짜기 몸서리도 안 나나, 여기 왜 오는데 안 그럽니까?
  그래도 어른도 거기 계셨고 선산이 거기 있으니까 아무래도 올 자리 와야 안 되겠습니까?

○위원장 정교철   예, 잘 오셨습니다.

○참고인 이금순   이 골짜기에 무슨 미련이 남고 몸서리가 날 것인데 왜 오느냐고 보는 사람마다 그럽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위원장 정교철   그러면 순서대로 증언을 잘 들었습니다.

○참고인 이금순   저는 배운 것도 없고 말주변도 없고 그렇습니다.

김인규 위원   제가 한 말씀드리겠는데 정영호 선생님께서 한 차에 30명쯤 타셨다고 하셨는데, 하루에 아홉 차씩 그것이 보통 얼마나 지속되었습니까?



○위원장 정교철  


○참고인 정영호   방위대가 7월 10일내지 15일 됐으니까 7월 20일경서부터 여하튼 9월 언제까지 갔는데 그런데 그때는 제가 끝마무리는 제가 군대 갔기 때문에, 군대에 가도 누구 말처럼 이름도 없는 남산초등학교 화차타고 대구에 내리면 보행으로 해서 남산국민학교에 가면 군번 가마니를 부어놓고 선착순으로 하나씩 주어서 오라고 합니다.
  이러면 만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두 개를 주워온 놈은 한 대 맞고 그것 전부 지휘를 방위가 했습니다.
  현역은 안 하고.
  그래서 그때 나도 등신이지만 내 보다 더 등신이 많았습니다.
  인민공화국이 좋으냐, 인민공화국 만세 불러 보라고 하면 그 연병장에서 인민공화국 만세 부르다가 작대기로 두드려 맞고 한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군번 하나 주우라고 해서 나도 주워서 나도 여기 왔어요.
  6.25참전 신청하려니까 군번이 없어서 못해요.
  왜냐하면 안동 저기에 영천으로 해서 안동에 한참 싸울 때인데 이 놈의 자식, 옷에 넣어서 돌아다니니 나중에 옷은 다 떨어지고, 그때 죽은 놈 옷하고 신하고 막 신었습니다.
  그래서 옷 갈아입다가 군번을 안 챙겨서 가면 군번을 잃어버리고 없거든요.
  그래서 요즘 6.25 참전자 신청하려고 하니 이것은 어디가서 이야기도 못해요.
  그래서 아까 결국은 우리 부대가 박격포 부대인데 그때는 처음에 신병은 소속을 잘 안 가리켜 줍니다.
  그냥 7연대 2대대 3소대다 이것만 알고 있거든요.
  박격포 부대인데, 그런데 그것이 저기서 포위돼서 그때부터 나도 내려오는 길인데 내려오다가 와촌지서에 오니까 손 들어 하면서 지서 끌고 들어갑니다.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군대에서 낙오돼서 온다, 그러면 어떻게됐거나 조사는 내일 받고 자자, 피곤하고 지서에 드러 누었습니다.
  나중에는 조사도 안 받고 가라고 사정을 합니다.
  저기 구루마에 가서 자라고 합니다.
  그때 와촌에 구루마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6.25때 참전용사들 신청하라고 하는데 건더기가 있어야 신청을 하지, 뭐가 있어요, 헛수고했지.
  그런데 얼마 전에 내가 현동에 있으니까 회장이 와서 당신 6.25 참전 신청하려니 아무 근거가 없다, 그래서 군번 없는 것은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고 그래서 하는 말이 65세 이상은 연금이 나온다, 정부 정책이 글러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6.25간 사람이 한 살 먹었거나 두 살 먹었거나 간 것은 똑같지 연령제한 하는 것은 정부에서 돈 적게 주려고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이말까지 했습니다.

김인규 위원   그리고 선생님!
  30명해서 하루에 여덟 차나 아홉 차가 올라갔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그러면 하루에 270명쯤 됩니다.
  열흘만 가면 2,700명입니다.
  그렇지요?

○참고인 정영호   예.

김인규 위원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유족회장님이 추측하시는 것이 3,000명 내지 3,500명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을 보면 7월 20일부터 9월 중순까지 계셨다면서요?
  그러면 두 달간인데 그러면 계속 올라간 것이 아닌 모양이지요?

○참고인 정영호   대충 계속 다 올라갔습니다.
  쉬는 날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니까 회장님이 말씀하셨지만 내가 볼 때는 3,500명이 넘는다, 밑에 큰 굴은 내가 모르겠는데 들어가면 지하로 뚫렸답니다.
  거기에 가서 총알받이 쏘면 앞에 있던 것이 맞든지 안 맞든지 앞에 넘어지면 거기에 대고 사격을 하는데 그렇다는데 그 굴이 찼다면 대충 짐작하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오리나무 밭에 묻은 것은 결국 인원이 차서 묻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저께 회장님하고 답사하러 가자니까 지역도 지금 낯설고 그 위에 굴 안에 있는 것은 그때 일제 때 비상구라고 있어요.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아는데 비상판 굴이 있어요.
  그 굴에도 안 들었겠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산에 묻었다면 여기도 들었을 것 아니냐 이것은 내 추측입니다.

○위원장 정교철   비상굴은 어디입니까?

○참고인 이태준  


○위원장 정교철   예, 다른 증언 더 이상 하실 것이 없습니까?
  없으면 오늘 오전부터 지금까지 한국 전쟁 후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한 목격자 및 유족측 증언을 청취하였습니다.
  오늘 증언된 내용은 향후 우리 경산지역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사건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 가지 바쁘신 가운데도 불구하시고 본 특위에 참석하여 증언해 주신 증언자 여러분들과 동료위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제68회 경산시의회 임시회 폐회중 청원심사특별위원회 제2차 회의 산회를 선포합니다.

(16시17분 산회)


경산시의회 의원프로필

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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